11화
질문에 답할 시간
11화, 질문에 답할 시간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2

월요일 아침, 유이는 현관 앞에서 봉투를 한 번 더 확인했다.
받는 사람 이름은 와타나베.
보내는 사람 이름은 타카하시 유이.
주소도 맞고, 우표도 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 봉투 입구를 접어서 닫았다 열었다는 반복하게 됐다. 질문이라는 건 이상했다. 종이에 적어 봉투에 넣었는데도, 꼭 손에서 빠져나가면 되돌릴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식탁에 앉아 있던 타카하시는 신문을 펼친 채로 유이를 보고 있었다.
“편지 부치고 올게.”
유이가 말했다.
타카하시는 신문을 접었다.
“그래. 직접 넣고 와.”
“아빠 통해서 전할 수도 있었는데.”
“그랬으면 그건 네 질문이 아니게 되지.”
유이는 잠깐 웃었다.
고마운 말이었지만, 동시에 무거운 말이었다.
집 앞 우체통은 평소처럼 빨갰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골목 모퉁이에 서 있었다. 유이는 봉투를 넣기 전, 받는 사람 이름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았다.
와타나베.
회사 문서 속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읽을 수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유이에게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봉투가 우체통 안으로 떨어졌다.
툭.
소리는 작았다. 그런데 유이는 그 소리가 하루 종일 귀에 남을 것 같았다.
동양출판에 우편물이 도착한 건 며칠이 지나서였다.
총무부 직원이 부서별 우편물을 나누고, 와타나베 이사실 앞 트레이에 봉투 몇 개를 올려놓았다.
업무가 막바지에 이른 까닭에 거의 이 곳에서 상주하고 있던 아카리는 자료실로 내려갈 서류철을 들고 복도를 지나가다 우연히 그 봉투 하나를 보았다.
타카하시 유이.
발신자 이름을 알아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카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누군가의 문 앞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모든 문은 열어도 되는 문이 아니었다.
아카리는 자료실 문을 열며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내가 열어 볼 봉투가 아니야.”
와타나베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들어 오는 길에 봉투를 집어 들었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학생의 글답게 정중했지만, 이상하게 물러설 곳이 없었다. 회사에 보내는 공식 질의도 아니고, 감정에 기대는 부탁도 아니었다.
'1971년 동양출판과 세이와미디어그룹의 공동 기획 자료에 대해, 당시 관계자로서 기억하시는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
와타나베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공식 문서라면 결재 라인을 확인하면 됐다.
기자라면 홍보를 통하라고 말하면 됐다.
하지만 이 편지는 타카하시의 딸이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제 막 자기 질문을 갖기 시작한 한 사람의 편지였다.
와타나베는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잠시 뒤 다시 들었다.
타카하시의 내선 번호는 외우고 있었다.
“와타나베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타카하시가 조용히 받았다.
“네, 이사님.”
“따님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평소 와타나베답지 않은 정중한 말투였다.
“그렇군요.”
“알고 있었습니까?”
“며칠 전 부친다고 들었습니다.”
“자네가 부탁한 겁니까?”
“아닙니다.”
“말리지는 않았고요?”
“말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와타나베는 창밖을 보았다. 겨울 햇빛은 건물 유리창에 힘없이 기대어 있었다.
타카하시가 먼저 말했다.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와타나베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더 거절하기 어렵다는 걸 모르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는군.”
“이번엔 제가 부탁할 일이 아니니까요.”
와타나베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부탁이라면 거절할 수 있었다.
압박이라면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질문은 피할수록 더 오래 남았다.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네.”
“따님께는 내가 직접 답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도 와타나베는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후 3시쯤, 아카리는 공개용 자료 목록 확인표를 들고 와타나베 이사실에 들어갔다.
와타나베의 책상 위에는 오전에 본 흰 봉투가 접힌 채 놓여 있었다. 아카리는 보지 않으려 했지만, 보지 않으려 할수록 눈에 들어왔다.
와타나베가 먼저 물었다.
“나카무라 씨.”
“네.”
“답장을 안 하는 것도 답이 됩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아카리는 서류철을 내려놓고 잠깐 생각했다.
“상대가 기다리고 있으면요.”
“기다리고 있으면?”
“아무 말 하지 않는 것도 답장처럼 남습니다.”
와타나베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말을 참 똑바로 합니다.”
“제가 젊어서가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 쪽에서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기다리는 사람 쪽이라.”
“회사에서는 보통 보내는 쪽 사정만 보니까요.”
와타나베는 말없이 확인표를 넘겼다. 공개용 자료에서 개인명이 가려진 부분, 보존용 자료에 원문을 남긴 부분, 그리고 가림 처리 사유를 별도 기록하겠다는 아카리의 주석이 보였다.
“이것도 답이군요.”
“네?”
“어디까지 보이고, 어디부터 남기는지. 그것도 결국 누군가에게 하는 대답 아닙니까.”
아카리는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와타나베는 도장을 들었다.
작은 빨간 원이 종이 위에 내려앉았다.
전에도 수없이 본 도장이었는데, 오늘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끝이라는 표시가 아니라, 다음 사람이 확인할 수 있도록 남겨 둔 아주 작은 문 같았다.
아카리가 방을 나오자, 마루산상사에서 업무지원을 온 미사키가 다가왔다.
“저 와타나베 이사라는 분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한 날도 있는 거지.”
“뭔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
아카리는 서류철을 품에 안았다.
“있어도 내가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아.”
미사키가 입을 삐죽였다.
“요즘 나카무라 주임님 선이 너무 분명해요.”
“흐리게 해 두면 나중에 내가 넘어져.”
미사키는 잠깐 아카리를 보다가 웃었다.
“그말 좀 멋있네요.”
“멋있는 말 아니야. 정말 넘어지면 아프니까 하는 말이지.”
같은 시간, 켄타는 교실에서 작문 발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목은 ‘주변 어른의 일’이었다.
친구들은 아버지 회사 이야기, 어머니가 도시락 가게에서 일하는 이야기, 형이 취업 준비를 하는 이야기를 읽었다. 켄타는 자기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손에 땀이 났다.
드디어 이름이 불렸다.
켄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엄마는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합니다.”
첫 문장은 괜찮았다.
두 번째 문장도 괜찮았다.
“다음 사람이 헷갈리지 않게 남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몇몇 친구들이 고개를 들었다. 켄타는 작문 용지를 더 꼭 쥐었다.
그다음 문장은 보호자 면담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카리가 학교에서 “제가 보호자입니다”라고 말했던 날.
창피해도 해야 하는 말이 있다고 했던 날.
켄타는 목이 막혔다.
국어 선생님이 조용히 물었다.
“괜찮니?”
켄타는 작문 용지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이 부분은 안 읽어도 될까요?”
교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선생님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네가 쓴 글이라고 해서 전부 읽어야 하는 건 아니야.”
켄타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저는 기록은 전부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이 찾을 수 있게 남겨 두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발표가 끝나고 자리에 앉았을 때, 켄타의 얼굴은 뜨거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부끄럽지만은 않았다.
읽지 않은 문장이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안에 더 분명히 남았다.
저녁이 되자 편의점의 형광등이 평소처럼 밝아졌다.
켄타는 계산대 아래에서 인수인계 노트를 꺼내 유이에게 넘겼다. 둘은 늘 이렇게 몇 분 정도 겹쳤다. 켄타의 근무가 끝날 무렵, 유이의 근무가 시작됐다. 긴 이야기를 하기엔 짧고, 아무 말도 안 하기엔 이상하게 아까운 시간이었다.
켄타가 앞치마 끈을 풀며 말했다.
“오늘 작문 발표했거든요. 긴장했는지 유난히 피곤하네요.”
“작문? 아카리 씨 인터뷰한 거?”
“네. 근데 중간에 한 부분 안 읽었어요.”
“왜?”
“엄마 얘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요.”
유이는 잠깐 조용해졌다가 말했다.
“잘했네.”
“안 읽는 것도 잘한 거예요?”
“응. 왜 안 읽는지 네가 알고 있으면.”
켄타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한 번 되뇌어 보았다.
“쓴 건 다 보여 줘야 하는 줄 알았어요.”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지금은요?”
유이는 계산대 옆에 놓인 동전통을 정리하며 말했다.
“지금은, 들은 걸 다 쓰는 게 꼭 정직한 건 아니라는 걸 조금 알겠어.”
켄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이 씨 편지는요?”
“부쳤어.”
“답 왔어요?”
“아직.”
유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목소리가 아주 조금 굳었다. 켄타는 알아챘지만 모른 척했다.
“답 기다리는 것도 힘들죠?”
“응. 근데 기다려야지. 내가 던진 질문이면, 상대가 주울 시간도 줘야 하니까.”
켄타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거 작문에 썼으면 좋았겠다.”
“다음 작문에 써.”
“다음에도 엄마 얘기 쓰면 엄마가 싫어할걸요.”
“그럼 네 얘기 써.”
켄타는 가방을 메며 웃었다.
“그게 제일 어려운데.”
자동문이 열리고, 찬바람이 들어왔다.
“조심히 가.”
“유이 씨도 무리하지 마세요.”
문이 닫히고 나서, 유이는 인수인계 노트 맨 아래에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질문은 조금씩 변한다.’
와타나베는 퇴근길에 곧장 집으로 가지 않았다.
칸다역에서 내려 큰길을 피하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간판들이 낮게 붙어 있고, 작은 음식점들에서 조림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여 나왔다.
스낵 雪(눈).
간판 앞에서 와타나베는 한참 멈춰 섰다.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문을 열자 작은 종이 울렸다.
마마는 카운터 안쪽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 그녀는 와타나베를 보자마자 놀라지도, 반갑다는 말을 과하게 하지도 않았다.
“오랜만이네요.”
“기억하십니까?”
“기억 못 하면 이 장사 못 해요. 다만 말하지 않을 뿐이지.”
와타나베는 코트를 벗고 카운터에 앉았다.
“오늘은 술 말고 물로 부탁합니다.”
마마가 피식 웃었다.
“다들 나이 들면 현명한 척을 해.”
“척이라도 해야 할 나이가 됐습니다.”
마마는 물잔을 내밀었다. 와타나베는 술도 아닌 물잔을 양손으로 감쌌다.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마마가 말했다.
“누가 찾아왔나 보네요.”
“편지가 왔습니다.”
“회사에서?”
“아니요. 개인에게.”
“그게 더 무섭지.”
와타나베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한 학생이 1971년에 대해 묻고 싶다고 합니다.”
마마는 잔을 닦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 학생이 뭘 알고 있는데요?”
“아마, 아직 많이 모르겠죠.”
“그럼 다행이네.”
“왜요?”
“모르는 사람은 들을 수 있으니까.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듣는 척만 해요.”
와타나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마는 카운터 아래에서 작은 접시를 꺼내 조린 곤약을 올려놓았다.
“예전에도 여기서 많이들 떠들었죠. 책이 끝이 아니라느니, 화면이 어떻다느니, 아이들이 앞으로 뭘 보게 될 거라느니.”
“우리가 뭘 바꿨을까요?”
“세상은 조금 바뀌고, 사람들은 많이 다쳤죠. 늘 그렇잖아.”
그 말은 날카로웠지만 탓하는 투는 아니었다.
와타나베는 주머니 안쪽의 편지를 꺼내지는 않았다.
이 가게까지 증거 보관실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가 말하면 누군가는 불편해질 겁니다.”
마마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미 불편해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에요?”
와타나베는 웃지도 못하고 물잔만 내려다보았다.
“만나서 말해요. 말 못 할 건 못 한다고 하고, 기억 안 나는 건 기억 안 난다고 하고. 괜히 멋있게 정리하려고 하지 말고.”
“그게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물 마시고 있는 거잖아요. 술로 용기 내면 다음 날 다 틀어져요.”
그 말에 와타나베는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가게를 나왔을 때, 골목 공기는 더 차가워져 있었다. 역 쪽으로 걷다 보면 공중전화가 하나 있었다. 와타나베는 그 앞에서 멈췄다.
유이의 편지 아래에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는 동전을 넣고 번호를 눌렀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유이는 책상 앞에서 원고를 고치고 있었다.
거실에서는 타카하시가 신문을 읽고 있었다. 전화벨이 두 번 울리자, 유이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타카하시 유이 씨입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유이는 곧 알았다.
“네.”
“와타나베입니다.”
유이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 거실의 타카하시도 신문을 내렸다.
“편지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식적인 답변은 회사 문서 안에 있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그 문서 밖에 남은 기억뿐입니다.”
유이는 펜을 잡으려다가 멈췄다. 지금 받아 적기 시작하면, 이 대화가 너무 빨리 기록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기억도 듣고 싶습니다.”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확인하면서 쓰겠습니다.”
와타나베는 잠시 침묵했다.
“처음 30분은 녹음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만나겠습니다. 그 뒤에 무엇을 남길지 같이 정하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와타나베가 말했다.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유이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차분히 대답했다.
“네. 만나서 듣겠습니다.”
장소는 칸다의 스낵 눈.
시간은 수요일 저녁 여섯 시.
영업 시작 전, 아직 손님이 오기 전의 조용한 시간.
전화를 끊고도 유이는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타카하시가 조용히 물었다.
“와타나베 씨니?”
“응.”
“만나기로 했어?”
“수요일. 칸다에서.”
타카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지 않는 게 좋겠지.”
유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응.”
그 말이 아버지를 밀어내는 말처럼 들릴까 봐 마음이 걸렸다.
하지만 타카하시는 먼저 웃었다.
“괜찮다. 이번 질문은 네가 들고 가야 해.”
“아빠 얘기도 나올 거야.”
“그렇겠지.”
“괜찮아?”
타카하시는 신문을 접었다.
“괜찮지는 않아. 그래도 들어야 할 말이면 들어야지.”
유이는 고개를 숙였다.
“다 듣고 나서 아빠한테 말해도 돼?”
“네가 말할 수 있는 데까지만.”
그 말이 유이를 조금 안심시켰다.
대답에도 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두 사람은 이제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그날 밤, 켄타는 작문 용지를 가방에 넣어 두었다. 발표 때 읽지 않은 문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카리는 설거지를 하다가 물었다.
“발표 잘했어?”
“중간에 안 읽은 데 있어.”
“왜?”
“엄마 얘기라서.”
아카리는 물을 잠갔다.
“고마워.”
켄타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안 읽었는데?”
“그래서 고마워.”
켄타는 가방 쪽을 힐끗 보았다.
“쓴 건 괜찮아?”
“응. 네가 쓴 거니까.”
그 말에 켄타는 안심했다.
보여 주지 않는 것과 없애는 것은 다르다.
그걸 오늘은 조금 더 알 것 같았다.
와타나베는 집에 돌아와 코트를 걸었다.
주머니 안에는 유이의 편지가 그대로 있었다. 그는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답장은 쓰지 않았다. 대신 달력의 수요일 칸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다.
그 점은 약속 표시였다.
그리고 오래 미뤄 둔 대답의 시작이었다.
유이는 책상 위에 새 카세트테이프를 올려 두었다. 아직 비닐은 뜯지 않았다. 수요일에는 처음 30분 동안 녹음하지 않기로 했다. 기록하지 않는 시간이, 오히려 가장 오래 남을지도 몰랐다.
아카리는 켄타의 작문을 읽지 않았다. 가방 안에 그대로 두었다. 엄마에게도 아직 보여 주지 않은 문장이 있다는 사실이, 그 밤에는 왠지 괜찮았다.
봉투는 열렸고, 답장은 아직 쓰이지 않았고, 약속은 생겼다.
말하지 않는 것도 답처럼 남는다면,
이제 누군가는 말하기 위해 조용히 자리를 준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