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거래의 내막
13화, 거래의 내막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2

1971년 11월, 세이와미디어그룹 회의실의 창문은 동양출판보다 컸다.
젊은 와타나베는 그 창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회색 건물들 사이로 도쿄가 납작하게 펼쳐져 있었다. 동양출판 건물에서 보던 풍경보다 조금 더 높고, 조금 더 차가웠다.
그는 서류 봉투를 품에 안고 있었다.
봉투 안에는 동양출판 영업기획부의 신매체 전개 기획안이 들어 있었다.
초안을 쓴 사람은 타카하시 류지. 하지만 표지에는 개인 이름보다 부서명이 더 크게 적혀 있었다.
동양출판 영업기획부.
그 글자는 이상하게 든든했다.
개인의 이름보다 회사 이름이 앞에 있을 때, 사람들은 죄책감을 덜 느낀다. 그때의 와타나베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아니, 몰랐다고 믿고 싶었다.
세이와의 쿠로다는 회의실 안쪽에서 담배를 끄며 말했다.
“동양출판도 꽤 재밌는 생각을 하네요.”
와타나베는 의자에 앉았다.
“책만으로는 어렵다는 판단이 내부에 있습니다.”
“영상, 음성, 교재, 장난감, 방송. 결국 다 같은 이야기를 다른 그릇에 담는 일이죠.”
쿠로다는 기획안 첫 장을 넘겼다.
그의 손끝이 한 문장 앞에서 멈췄다.
이야기는 책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문장, 누가 썼습니까?”
와타나베는 잠깐 멈췄다.
“부서 안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부서 안이라.”
쿠로다는 웃었다. 믿는다는 뜻도, 믿지 않는다는 뜻도 아닌 웃음이었다.
“세이와에서는 이런 사람을 원합니다.”
와타나베는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등을 폈다.
그 무렵 그는 세이와로 옮기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동양출판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돈도 많고, 미래라는 말을 더 크게 쓰는 회사. 그 안에 들어가면 자신도 지금보다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쿠로다가 다음에 한 말은 와타나베가 기대한 말이 아니었다.
“이걸 쓴 사람, 타카하시 씨였습니까?”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않았다.
쿠로다는 서류를 덮었다.
“그 사람과 한 번 이야기해 보고 싶군요.”
그 순간 와타나베는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꺾이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가 문을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문 안쪽에서 부른 이름은 자신이 아니었다.
스무 해가 지난 뒤, 동양출판 8층 작은 응접실에는 겨울 햇빛이 가늘고 희미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와타나베 이사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해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오래된 갈색 봉투 하나를 올려놓았다.
봉투에는 손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71년 세이와 협의 관련 개인 메모.
공식 문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공식 문서가 되지 못한 것들이 오히려 사람을 더 오래 따라다닐 때가 있었다.
문이 열리고 타카하시가 들어왔다.
“이사님.”
“시간 내 줘서 고맙네.”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회사 안에서 수없이 마주 앉은 사이였다. 회의, 결재, 보고, 인사 평가, 자료 검토.
하지만 오늘의 침묵은 그 모든 자리와 달랐다.
타카하시는 테이블 위 봉투를 보았다.
“유이에게 들었습니다. 만나셨다고요.”
“그래. 만났네.”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와타나베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가, 다시 무릎 위로 내렸다.
“謝りに来ました。(사과하러 왔네.)”
타카하시의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와타나베를 더 어렵게 했다.
“무엇을요?”
짧은 질문이었다.
와타나베는 봉투를 천천히 밀었다.
“자네의 기획안을 세이와에 전달한 일. 자네 이름을 충분히 남기지 않은 일. 그리고 그걸 회사 절차라는 말 뒤에 숨긴 일.”
타카하시는 봉투를 열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유이에게 어느 정도 들었습니다.”
“오늘은 그보다 할말이 더 있네.”
와타나베는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그 기획안이 그냥 넘어간 게 아니었네.”
타카하시의 시선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무슨 뜻입니까?”
“대가가 있었네.”
응접실 밖 복도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멈췄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와타나베가 이어 말했다.
“세이와는 그때 종이책 쪽 사업 일부를 정리하려고 했네. 영상기획실을 키우고 있었고, 앞으로 음악, 방송, 캐릭터 쪽으로 더 움직이려 했지. 대신 지방 출판사들과 맺고 있던 아동서·교육서 관련 창구, 절판 도서 재판 협의, 학교와 도서관 납품 루트, 원권리자 연락망 같은 것들이 있었네.”
타카하시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저작권 자체를 통째로 넘긴 건 아니었네. 그건 작가와 원권리자 동의가 필요한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세이와가 갖고 있던 사업 창구와 우선 교섭권, 관리 대행 계약 일부가 동양출판으로 넘어왔지.”
“그 대가로 제 기획안을 넘긴 겁니까?”
“회사 명의로.”
“제게는 말하지 않고.”
와타나베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
타카하시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조금 숙인 자세 그대로 있었다.
“그러면 그건 아이디어를 넘긴 게 아니라, 저를 빼고 거래를 한 거군요.”
와타나베는 그 말을 피하지 못했다.
“맞네.”
“그 거래로 동양출판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전국 학교·도서관 영업망을 넓혔네. 지방의 작은 출판사들이 갖고 있던 아동서와 학습서 목록을 우리 카탈로그에 넣을 수 있었고, 몇몇 절판 도서는 동양출판 이름으로 다시 협의할 수 있게 됐지. 그 이후 몇 년 동안 회사 매출에 도움이 됐네.”
“그리고 이사님도요?”
와타나베는 대답이 늦었다.
타카하시가 다시 물었다.
“그 성과가 이사님 인사기록에도 남았습니까?”
“남았네.”
“신규 사업 제휴 성과.”
“그래.”
타카하시는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빠지는 소리였다.
“저는 그 기획안을 쓰고도, 그 기획안이 회사에 무엇을 가져왔는지 몰랐군요.”
와타나베는 고개를 숙였다.
“会社のためだと言いました。(회사를 위해서라고 말했네.)”
“누구에게요?”
“상사에게도, 세이와에도, 나 자신에게도.”
“그리고 사실은요?”
와타나베는 오래 침묵했다.
응접실 탁자 위에는 오래된 봉투와 물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물잔은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사실은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네.”
타카하시는 그를 바라보았다.
“세이와로 가려고 했습니까?”
와타나베의 눈썹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알고 있었나?”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와타나베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가고 싶었네. 그 회사는 커 보였고, 빠르게 움직였고, 내가 동양출판에서 얻지 못한 이름을 줄 것 같았네.”
“그런데 세이와가 원한 건 이사님이 아니라 저였습니까?”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타카하시의 손이 봉투 위에 놓였다.
“그때 제게 말했으면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 갔을지도 모르지.”
“그게 싫었습니까?”
와타나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싫었네.”
그는 마침내 타카하시를 똑바로 보았다.
“私は、あなたが羨ましかった。(나는 자네가 부러웠네.)”
타카하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네는 글을 썼고, 사람들은 그 문장에 멈춰 섰네. 나는 회의를 잡고, 사람을 만나고, 도장을 받아 오고, 길을 만들었지. 그런데 문이 열리면 안쪽에서 부르는 이름은 늘 자네였네.”
“그래서 제 이름을 지웠습니까?”
“처음부터 지우려고 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네.”
“그 말은 믿기 어렵군요.”
“나도 이제는 잘 모르겠네. 처음엔 보호라고 생각했네. 젊은 직원의 이름이 밖에 나가면 책임이 따라온다고. 회사 이름으로 두는 게 안전하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지. 보호라는 말이 얼마나 편한 핑계였는지.”
와타나베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네가 그 문장을 더 이상 말하지 않을 때, 나는 안심했네. 자네가 스스로 한 발 물러났다고 생각했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네. 그래야 내가 덜 비겁해 보였으니까.”
타카하시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제가 물러난 게 아니라, 제가 어디에 서 있었는지 몰랐던 겁니다.”
와타나베는 눈을 감았다.
그 말은 비난보다 무거웠다.
“借りたまま、返し方を決めませんでした。(빌린 채로, 돌려주는 방법을 정하지 않았네.)”
“빌린 게 아닙니다.”
타카하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빌렸다고 말하려면, 빌리는 사람과 빌려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와타나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러면 그건 빌린 게 아니라 가져간 겁니다.”
응접실 안의 공기가 아주 천천히 가라앉았다.
와타나베는 그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같은 시각, 마루산상사 IT추진실에서는 팩스 한 장이 도착했다.
미사키가 종이를 들고 아카리 자리로 왔다.
“주임님, 동양출판 쪽에서 왔어요.”
아카리는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팩스 상단에는 동양출판 30주년 자료 전산화 관련 요청이라고 적혀 있었다.
일부 항목 공개 반영 보류.
보존용 원문은 현 상태 유지.
추가 지시 전까지 외부 출력 금지.
미사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생긴 걸까요?”
아카리는 종이를 천천히 읽었다.
“생겼겠지.”
“우리가 물어봐야 해요?”
“아니. 우리는 마루산상사 IT추진실이고, 이건 동양출판이 맡긴 자료야. 요청 범위 안에서 처리하면 돼.”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하지.”
“그런데요?”
아카리는 팩스를 투명 파일에 넣었다.
“궁금하다고 남의 회의실 문을 열 수는 없지.”
미사키는 잠시 아카리를 보았다.
“요즘 주임님 말이 점점 엄격해져요.”
“일이 엄격해지는 거야. 사람이 따라가는 거고.”
아카리는 전산화 목록의 해당 행에 ‘공개 반영 보류’라고 입력했다. 그리고 비고란에 덧붙였다.
요청 기관 : 동양출판.
처리 기관 : 마루산상사 IT추진실.
소속을 분명히 쓰는 일.
그것은 때로 누군가의 이름을 지키는 가장 작고 단단한 방법이었다.
동양출판 응접실에서 타카하시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복사본 몇 장과 와타나베의 손글씨 메모가 들어 있었다. 종이는 누렇게 변했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타카하시는 첫 장을 읽었다.
세이와 측 제안 요지.
전국 아동·교육 출판 관련 영업 창구 일부 이관.
동양출판 신매체 기획안 공동 검토.
향후 영상·음성·교재화 사업에서 상호 협력.
아래쪽에는 작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쿠로다.
와타나베.
타카하시의 이름은 없었다.
그는 종이를 다시 내려놓았다.
“이 문서를 왜 지금까지 갖고 있었습니까?”
와타나베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버리지 못했네.”
“죄책감 때문에요?”
“처음엔 보험이었네.”
타카하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와타나베는 피하지 않았다.
“혹시 일이 잘못되면, 나도 혼자 책임지지 않으려고. 회사의 거래였다는 걸 증명하려고 갖고 있었네. 나중엔...버리면 정말 없던 일이 될까 봐 버리지 못했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지키는 문서였군요.”
와타나베는 그 말을 맞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타카하시는 더 말하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회사 앞 도로를 버스가 지나갔다. 사람들은 점심을 먹으러 나가고, 돌아오고,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도쿄는 한 사람의 오래된 상처와 상관없이 잘도 움직였다.
그게 화가 나다가도, 이상하게 다행이었다.
세상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도 언젠가는 다음 문장을 말할 수 있었다.
와타나베가 말했다.
“이 일을 유이 씨 원고 뒤에 숨기고 싶지 않네. 자네에게 직접 말해야 했네.”
“늦었습니다.”
“알고 있네.”
“너무 늦었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네.”
타카하시는 봉투를 다시 접었다.
“용서받으려고 오신 겁니까?”
와타나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그럼요?”
“더 이상 자네가 모르는 상태로 두고 싶지 않았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척하는 상태로도 있고 싶지 않았네.”
타카하시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許せるかどうかは、まだ分かりません。(용서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와타나베는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이면 충분하네.”
“충분하지 않습니다.”
타카하시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충분하지 않지만,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와타나베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타카하시는 봉투를 들고 일어났다.
“이 문서는 공식 기록으로 넘겨야 합니다. 다만 유이의 졸업작품과는 별개입니다.”
“동의하네.”
“그리고 이사님.”
“말하게.”
“제 딸의 원고를, 이사님의 구원으로 쓰지 마십시오.”
와타나베는 그 말을 오래 받아들였다.
“그러지 않겠네.”
타카하시는 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췄다.
“今日は、聞いたことにします。(오늘은 들은 걸로만 하겠습니다.)”
그 말은 용서가 아니었다.
화해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침묵을 끊는 첫 번째 대답이었다.
유이는 대학 도서관 3층에서 자료를 펼쳐 놓고 있었다.
세이와 관련 연표, 동양출판 자료 목록, 아버지 인터뷰 녹취록, 와타나베와의 인터뷰 메모.
책상 위에는 종이가 너무 많았고, 정작 쓰려는 문장은 잘 나오지 않았다.
전화가 온 건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유이는 도서관 복도 끝 세미나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빠다.”
유이는 수화기를 꼭 잡았다.
“오늘... 만나셨어?”
“그래.”
“괜찮아?”
타카하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때문에 유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하긴 어렵구나.”
“미안해.”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내가 물어서...”
“아니. 네가 물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오래 묻지 않았던 거다.”
유이는 벽에 등을 기대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어?”
“오늘은 다 말하기 어렵다.”
“응.”
“하지만 하나는 말해 두마. 네가 찾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더 크고, 더 작다.”
“무슨 뜻이야?”
“회사끼리 주고받은 것도 있고, 사람들이 자기 마음속에서 숨긴 것도 있다. 큰 거래와 작은 질투가 같은 봉투 안에 들어 있었어.”
유이는 펜을 찾지 않았다.
이 말은 받아적는 말이 아니라 듣는 말이었다.
타카하시가 이어 말했다.
“나는 아직 화가 난다.”
“응.”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 덜 혼란스러진 것 같다.”
유이는 눈을 감았다.
“그럼 오늘은...”
“오늘은 들은 걸로만 하려고 한다.”
아버지가 방금 와타나베에게 했던 말을, 유이는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만으로도 그 말이 얼마나 어렵게 나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나, 원고 바로 안 쓸게.”
“왜?”
“뜨거운 말은 바로 쓰면 데일 것 같아서.”
타카하시는 낮게 웃었다.
“그건 좋은 판단이네.”
“아빠.”
“응.”
“내가 아빠 편을 들어도 돼?”
타카하시는 한참 조용했다.
“들어도 된다.”
유이는 숨을 멈췄다.
“다만 사실을 줄여가면서 편들지는 마라.”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화를 끊고 나서도 유이는 한동안 복도에 서 있었다.
도서관 창밖으로 오후 햇빛이 기울고 있었다.
사람들은 조용히 책을 넘기고, 복사기를 쓰고, 연필로 밑줄을 그었다.
유이는 노트에 한 줄을 썼다.
‘아이디어를 빼앗긴 사람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자기 미래가 거래된 줄도 몰랐던 사람의 시간이다.’
그 문장을 쓰고 나서야 손끝이 조금 떨렸다.
그날 저녁, 와타나베는 동양출판 이사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빈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는 한참을 앉아 있다가 펜을 들었다.
1971년 세이와 협의 경위에 관한 개인 진술.
첫 줄을 쓰자 손이 멈췄다.
이 문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문서가 아니어야 했다.
그렇다고 자신을 벌하기 위한 문서만 되어서도 안 됐다.
그 사이 어딘가에, 오래전에 사라진 이름을 되돌릴 수 있는 문장이 있어야 했다.
와타나베는 다시 썼다.
해당 기획안의 초안 작성자는 타카하시 류지였으며, 당시 본인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공식 협의 과정에서 충분히 명시하지 않았다.
그 문장 하나를 쓰는 데, 스무 해가 걸렸다.
창밖의 도쿄는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건물들에는 불이 하나둘 켜졌다. 누군가는 야근을 하고, 누군가는 집으로 가고, 누군가는 술집 문 앞에서 들어갈지 말지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었다.
마루산상사 IT추진실의 불은 먼저 꺼졌다.
아카리는 그날 처리한 동양출판 위탁 자료 목록을 캐비닛에 넣어 잠그고 퇴근했다. 그녀는 아직 오늘 동양출판 응접실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몰랐다. 하지만 비고란에 남긴 소속 구분 한 줄이 언젠가 필요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있었다.
유이는 도서관에서 원고를 덮었다.
아직 쓸 수 없는 말들이 있었다.
하지만 쓸 수 없다는 이유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타카하시는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와타나베가 건넨 봉투는 가방 안에 있었다.
그는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듣는 일이, 용서보다 먼저 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