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이름을 돌려주는 법
20화, 이름을 돌려주는 법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3

겨울이 오면 도쿄의 빛은 더 선명해졌다.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유리창에 비친 네온은 더 또렷했고, 전철 창문에 비친 사람들의 얼굴도 더 오래 남았다. 하지만 밝아진다고 해서 따뜻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동양출판 30주년 전시회는 끝났다.
타카하시 류지의 이름은 1971년 신매체 사업안 옆에 놓였다.
와타나베 히로시의 진술서는 자료관리위원회 파일 안에 들어갔다.
마마의 영수증은 원본으로 다시 상자 안에 들어갔고, 복사본은 정해진 장소에만 남았다.
혼마의 이름도 세이와 어린이 미디어 라이브러리 개발 자료에 작게 들어갔다.
이름들은 조금씩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이름들이 사람을 곧바로 편하게 해주지는 않았다.
이름이 돌아오면, 사람은 그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그게 때로는 잃어버린 채 사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토요일 오전, 아카리는 코토구 구립도서관 2층 상담실 앞에 서 있었다.
문은 완전히 닫지 않았다.
복도에서는 사서가 책수레를 미는 소리가 들렸고, 어린이 열람실 쪽에서는 아이들이 낮게 웃는 소리가 흘러왔다.
켄타는 상담실 안에 앉아 있었다.
교복은 아니었다. 짙은색 점퍼에 평범한 바지. 손에는 작은 수첩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답을 더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늘은 끝을 정하러 온 날이었다.
완전한 끝은 아니어도, 적어도 누가 어디까지 들어올 수 있는지 정하는 날.
사토 켄지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그는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얇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아카리는 고개만 숙였다.
“나카무라 씨.”
사토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켄타를 보았다.
“나카무라 켄타 씨.”
아들도, 켄타 군도 아니었다.
그 점은 좋았다.
하지만 좋다고 해서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사토는 먼저 봉투를 꺼냈다.
“요청하신 문서입니다.”
아카리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각서가 들어 있었다.
나카무라 아카리 및 나카무라 켄타의 개인사, 과거 원고, 출생 관련 사정, 면담 내용, 편지 내용 등을 본인 동의 없이 교육 콘텐츠, 강연, 소개문, 교재, 기사, 회고문 등에 사용하지 않는다.
세이와미디어그룹 외부 협력자 소개문 및 관련 자료에서 해당 내용을 암시하거나 재구성하지 않는다.
향후 연락 및 만남은 나카무라 켄타 본인과 나카무라 아카리의 동의를 우선한다.
사토의 이름과 도장이 있었다.
아카리는 끝까지 읽고 켄타에게 넘겼다.
켄타는 천천히 읽었다. 모르는 한자는 아카리에게 묻지 않았다. 문장 전체의 뜻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정말 안 쓸 겁니까?”
사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쓰지 않겠습니다.”
켄타가 다시 물었다.
“엄마 글도요?”
“쓰지 않겠습니다.”
“나 만난 것도요?”
사토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쓰지 않겠습니다.”
켄타는 사토를 보았다.
“사과하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겠어요.”
사토는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켄타는 수첩을 닫았다.
“그럼 하나만요.”
“네.”
켄타는 천천히 말했다.
“쓰지 않는 것도 속죄입니다.”
사토는 눈을 들었다.
그 문장은 사토에게 낯선 방식의 벌이었다.
그는 늘 문장으로 도망쳤다. 잘 정리된 문장, 조금 슬픈 문장, 반성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문장.
그런데 켄타는 쓰지 말라고 했다.
사토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켄타는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아카리는 아들의 옆모습을 보았다.
켄타의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켄타가 말했다.
“알아야 할 건 들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사토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켄타는 이어 말했다.
“오늘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을 겁니다. 나중에도 부를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만날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걸 지금 정하라고 하지 마세요.”
사토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은 예전 같았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던 사람의 말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기다리는 쪽이 사토였고, 정하는 쪽이 켄타였다.
켄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카리는 각서 사본을 가방에 넣었다.
사토가 낮게 말했다.
“나카무라 씨.”
아카리는 그를 보았다.
“저는... 늦었지만 정말...”
아카리는 더 이상 그에게서 들을 말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토 씨.”
“네.”
“후회는 당신의 것입니다. 저와 켄타에게 나눠 들게 하지 마세요.”
사토는 입을 다물었다.
아카리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멈추세요.”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 끝에서 켄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카리는 그의 옆에 섰다.
“괜찮아?”
켄타는 잠시 생각했다.
“모르겠어.”
“응.”
“근데 오늘은... 내가 제대로 말한 것 같아.”
아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잘 말해줬어.”
켄타는 아주 작게 웃었다.
며칠 뒤, 아카리는 켄타의 학교에 갔다.
장학금 관련 서류를 다시 제출해야 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날에는 몸이 먼저 굳었다. 가족관계 확인, 보호자, 아버지의 칸, 빈칸.
그 작은 칸들이 사람을 너무 쉽게 재단했다.
교무실 창구에 앉은 직원은 서류를 확인하다가 말했다.
“아버지 칸은 공란으로 두셔도 됩니다. 혹시 이혼 관련 서류가 필요하면...”
아카리는 조용히 말했다.
“결혼한 적이 없습니다.”
직원은 고개를 들었다.
아카리는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
“보호자는 저 하나로 충분합니다. 필요한 서류가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직원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럼 이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아카리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몇 살에 아이를 낳았는지, 왜 그동안 이혼했다고 했는지.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교무실을 나와 복도에 섰을 때, 그녀는 창밖 운동장을 보았다.
학생들이 체육복 차림으로 뛰고 있었다.
그중 어디에도 과거의 자신은 없었다.
그런데도 오래전 학교 복도 냄새가 잠시 목을 조였다.
아카리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설명하지 않는 것과 숨는 것은 다르다.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그날 아카리는 아무에게도 자기 인생을 길게 해명하지 않았다.
다만 거짓말 뒤에 숨지도 않았다.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했다.
유이는 세이와미디어그룹 1층 공개 라운지에서 혼마를 만났다.
오오츠카도 함께 있었다.
공식 방문 기록에는 세 사람의 이름과 시간이 적혔다.
이제 그들은 그런 방식을 당연하게 여겼다.
혼마는 얇은 자료집을 유이 앞에 놓았다.
「어린이 미디어 라이브러리 개발 기록」
표지 아래쪽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데이터 구조 설계: 혼마 마사유키」
유이는 그 글자를 확인하려는듯 가까이 들여다 봤다.
“이름 들어갔네요.”
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오츠카 씨가 회의록을 남겨줬고, 저도 서명했습니다.”
오오츠카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내려놓았다.
혼마가 말했다.
“타카하시 씨 작품도 봤습니다. 전시회에서.”
“어땠어요?”
“무서웠습니다.”
유이는 살짝 웃었다.
“좋았다는 뜻은 아니네요.”
“좋았습니다. 그래서 무서웠습니다.”
혼마는 잠시 말을 골랐다.
“제 입장이 편하게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세이와 사람으로서, 개발부 사람으로서, 그리고 당신을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사람으로서요.”
유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혼마는 말을 이어갔다.
“제가 당신을 도우려 했던 말들 중 일부는, 실제로는 멈추게 하려는 말도 있었습니다.”
“전부는 아니었겠죠.”
“네.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혼마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 점이 더 어렵습니다. 진심도 있었고, 욕심도 있었습니다. 회사의 말도 있었고, 제 말도 있었습니다.”
유이는 차잔을 내려다보았다.
“혼마 씨.”
“네.”
“저는 혼마 씨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혼마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가까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조용하면서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유이는 말했다.
“제가 혼마 씨를 좋은 사람으로 빨리 정하지 않겠다고 했었죠.”
“네.”
“지금도 그래요. 하지만 혼마 씨가 멈춘 것도 잘 알고 있어요.”
혼마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
오오츠카는 기록지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오늘 이 말들은 공식 기록으로 남길 말이 아니었다.
혼마가 천천히 말했다.
“당신 작품에 제 이름이 필요하면, 써도 됩니다. 다만 필요한 만큼만요.”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둘 사이에는 끌림이 있었다.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끌림이 곧 길은 아니었다.
길이 있다고 해서,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켄타는 구립도서관 앞 계단에서 유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그곳을 지나가다 잠시 앉았다. 그런데 앉고 나니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겨울 햇빛은 짧았다.
도서관 유리문에 오후 빛이 비쳤고, 아이들이 책을 들고 드나들었다.
유이가 나왔다.
그녀는 켄타를 보고 멈췄다.
“켄타.”
“누나.”
두 사람은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이번에도 너무 가까이 앉지는 않았다.
켄타가 먼저 말했다.
“사토 씨 만났어요.”
“응.”
“아버지라고 안 불렀어요.”
“응.”
“나중에 부를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정할 일이야.”
켄타는 손가락을 모았다 폈다.
“그리고... 누나한테도 말할 게 있어요.”
유이는 그를 보았다.
켄타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애썼다.
“저, 누나 좋아했어요. 아니, 지금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말하고 나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래도 도망치지는 않았다.
유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켄타를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에 아프지 않게 닿을 말을 찾기 위한 침묵이었다.
잠시 뒤 유이가 말했다.
“말해줘서 고마워.”
켄타는 고개를 숙였다.
그다음 말이 무서울 줄 알고 있었다.
유이는 조심스럽게 이어 말했다.
“나는 네 마음을 소중하게 받을게. 하지만 지금 너와 같은 마음이라고 답해 줄 순 없어.”
켄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아요.”
“네가 어리기 때문만은 아니야.”
켄타가 고개를 들었다.
유이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지금 내 일을 정리해야 하고, 네 마음을 내가 기대는 자리로 만들고 싶지 않아. 그리고 너도 나를 붙잡는 마음으로 어른이 되면 안 돼.”
켄타는 한참 말이 없었다.
유이가 낮게 말했다.
“편이 되어주는 것과 곁에 있는 것은 달라.”
켄타는 그 말의 의미를 천천히 이해했다.
“누나는 제 편이에요?”
“응. 네가 너를 잃지 않기를 바라는 편.”
“그럼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켄타는 눈가가 조금 붉어졌지만 울지 않았다.
“좀 아플 것 같아요.”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플 거야.”
“아픈 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유이는 숨을 멈췄다.
켄타는 작게 웃었다.
“누나한테 대신 아파달라고 안 할게요.”
그 말은 아직 서툴렀다.
하지만 아주 어른스러운 말이었다.
유이는 그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늘은 그러지 않는 것이 켄타를 더 존중하는 일이었다.
“고마워, 켄타.”
이번 고마움은 선을 긋는 말이면서도, 버리는 말은 아니었다.
켄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서관 앞에 바람이 지나갔다.
열다섯 살의 마음 하나가 조금 다쳤다.
하지만 망가지지는 않았다.
와타나베의 퇴직일은 다음 달 말로 정해졌다.
그는 마지막 정리 자료를 자료관리위원회에 넘겼다.
진술서 원본, 쿠로다의 봉투 사본, 1971년 관련 사내 메모, 그리고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낡은 명함 몇 장.
퇴근길, 와타나베는 동양출판 1층 로비에서 타카하시와 마주쳤다.
둘은 잠시 서로를 보았다.
와타나베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남은 정리는 총무부에 넘겼습니다.”
“확인했습니다.”
“퇴직 전까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타카하시는 잠시 생각했다.
“필요한 것은 대부분 이미 늦었습니다.”
와타나베는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받아들이는 얼굴이었다.
“그렇겠지요.”
타카하시는 말했다.
“그래도 남길 것은 남기셨습니다.”
와타나베는 고개를 들었다.
“그걸로 충분합니까?”
“충분하지 않습니다.”
타카하시의 대답은 차분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와타나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는 로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자동문이 열리고, 겨울 공기가 들어왔다.
와타나베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진술서는 회사에 남았다.
사람은 떠났고, 문장은 남았다.
그 문장이 앞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스낵 “雪”에서는 마마가 양철 상자를 다시 열었다.
상자 안에는 영수증 묶음, 성냥갑, 컵받침, 명함, 그리고 새로 넣은 전시회 안내장이 있었다.
마마는 마지막으로 복사본 목록을 확인했다.
동양출판 자료관리위원회 보관.
마마 보관.
외부 공개용 익명 처리본.
그녀는 안내장을 영수증 묶음 위에 올렸다.
카운터에는 타카하시와 아카리가 앉아 있었다.
둘 다 천천히 술을 마셨다.
마마가 말했다.
“이제 상자는 닫을게요.”
타카하시는 고개를 숙였다.
“네.”
아카리는 물었다.
“괜찮으세요?”
마마는 웃었다.
“괜찮지는 않죠. 하지만 이제 이 상자가 나 혼자만의 상자는 아니니까.”
그녀는 상자 뚜껑을 닫았다.
작은 쇳소리가 났다.
“그날 밤을 내가 다 설명할 수는 없어요. 내가 본 건 테이블 하나, 술잔 몇 개, 남자 둘, 그리고 없는 사람 이름이었어요. 그게 전부였죠.”
마마는 잠시 손을 상자 위에 올렸다.
“근데 그 전부가 누군가에게는 충분했네요.”
타카하시는 조용히 말했다.
“충분했습니다.”
마마는 그를 보았다.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문 닫아도 되겠네요.”
아카리가 작게 웃었다.
“가게를요, 상자를요?”
“둘 다요. 오늘은 일찍 닫을래요.”
마마는 불을 조금 낮췄다.
스낵 “雪”의 간판은 골목 안에서 조용히 빛났다.
타카하시와 아카리는 칸다역 쪽으로 걸었다.
겨울밤의 공기는 차가웠다.
골목에는 술집 불빛이 남아 있었고, 역 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코트를 여몄다.
둘은 나란히 걸었다.
오늘은 사건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아카리가 말했다.
“켄타가 오늘 유이 씨에게 자기 마음을 말한 것 같아요.”
타카하시는 조금 놀랐다.
“그렇습니까.”
“네. 자세히는 묻지 않았어요. 하지만 얼굴을 보면 알죠.”
타카하시는 잠시 걷다가 말했다.
“유이도 조용했습니다.”
“아팠겠죠. 둘 다.”
“네.”
두 사람은 칸다역 앞 횡단보도에서 멈췄다.
신호등은 빨간불이었다.
타카하시는 전시회에서 본 자기 이름을 떠올렸다.
그 이름은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아내 키미코에게 하지 못한 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유이가 어릴 때 밤늦게 혼자 밥을 먹던 시간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낮게 말했다.
“이름이 돌아와도 시간은 돌아오지 않네요.”
아카리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네.”
“그래도...”
타카하시는 말을 멈췄다.
아카리가 대신 말했다.
“그래도 이름이 있어야, 그 시간을 내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죠.”
타카하시는 그녀를 보았다.
아카리는 신호등을 보고 있었다.
“저도 이제 ‘이혼한 여자’라는 말 뒤에 숨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제 이야기를 설명하고 다니지도 않을 거예요. 제 삶을 제가 부르면 되니까요.”
타카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가 바뀌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건넜다.
역 앞에 도착했을 때, 타카하시가 말했다.
“나카무라 씨.”
“네.”
“다음에도 함께 걸을 수 있겠습니까?”
아카리는 잠시 웃었다.
“네. 다음에도요.”
“언제인지 정하지 않아도 됩니까?”
“정하지 않아도, 우리 자주 같은 길에서 멈추잖아요.”
타카하시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렇군요.”
둘은 손을 잡지 않았다.
미래를 약속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음에 또 걷자는 말은 남았다.
그 정도의 약속이 지금의 두 사람에게는 가장 알맞았다.
다음 날 아침, 아카리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났다.
부엌은 아직 어두웠다.
형광등을 켜자 두 번 깜박인 뒤 불이 들어왔다.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고, 프라이팬을 달궜다.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예전에는 이 계란말이가 미안함 같았다.
말하지 못한 것들, 숨긴 것들, 괜찮다고 거짓말한 날들.
그 모든 것을 대신하는 노란 한 줄.
오늘도 계란말이를 말았지만, 마음은 조금 달랐다.
켄타가 방에서 나왔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좋은 아침.”
아카리가 말했다.
켄타는 식탁에 앉았다.
“좋은 아침.”
아카리는 도시락 통에 밥을 담고, 계란말이를 넣었다.
작은 소시지 두 개와 시금치 무침도 넣었다.
켄타가 물었다.
“오늘은 편의점 가는 날 아니야.”
“알아. 그래도 도시락은 필요하잖아.”
켄타는 도시락 통을 보았다.
“엄마.”
“응.”
“요즘 괜찮아?”
예전 같으면 아카리는 바로 말했을 것이다.
괜찮아.
엄마는 엄마니까 괜찮아.
오늘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잠시 생각했다.
“괜찮은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어.”
켄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아카리는 프라이팬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조금 괜찮은 쪽.”
켄타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럼 됐네.”
“너는?”
켄타는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나도 조금 괜찮은 쪽.”
두 사람은 그렇게 아침을 먹었다.
대단한 화해도, 큰 결말도 없었다.
그냥 밥과 된장국, 계란말이, 젖은 빨래 냄새, 등교 시간이 가까워 오는 아침이었다.
현관에서 켄타는 신발을 신었다.
문을 열기 전, 그는 늘 그렇듯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카리는 문 앞에 섰다.
“다녀와.”
켄타는 잠시 멈춰서 돌아보았다.
“엄마.”
“응?”
“오늘 도시락, 고마워.”
아카리는 웃었다.
“응.”
문이 닫혔다.
아카리는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
그 집 안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사토의 이름도, 앞으로의 연락도, 학교 서류도, 회사 일도, 타카하시와의 다음 걸음도.
하지만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 하나 줄어 있었다.
괜찮다는 거짓말.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 하나 줄어든 것만으로도, 그 집의 아침은 조금 더 넓어졌다.
📚 오늘의 한 문장 — 일본어 학습 박스
1. 書かないことも、償いです。 [かかないことも、つぐないです]
쓰지 않는 것도 속죄입니다.
자신의 반성이나 회복을 위해 타인의 이야기를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때 · 켄타가 사토에게 자신과 아카리의 이야기를 더 이상 글감으로 삼지 말라고 말한 장면
2. 知るべきことは聞きました。これからどうするかは、僕が決めます。 [しるべきことは ききました。これから どうするかは、ぼくが きめます]
알아야 할 건 들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필요한 설명을 들은 뒤, 관계를 어떻게 이어갈지는 스스로 정하겠다고 말할 때 · 켄타가 사토에게 아버지로 받아들일지 여부를 자신이 결정하겠다고 말한 장면
3. 説明しないことと、隠すことは違います。 [せつめいしないことと、かくすことは ちがいます]
설명하지 않는 것과 숨기는 것은 다릅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적인 일을 해명하지 않더라도, 거짓말 뒤에 숨지 않겠다고 말할 때 · 아카리가 학교 서류를 제출한 뒤, 더 이상 ‘이혼’이라는 말 뒤에 숨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장면
4. 味方でいることと、そばにいることは違います。 [みかたでいることと、そばにいることは ちがいます]
편이 되어주는 것과 곁에 있는 것은 다릅니다.
누군가를 응원하고 아끼지만, 같은 방식의 감정이나 가까운 관계로 답할 수 없을 때 · 유이가 켄타의 마음을 소중히 받으면서도 분명한 거리를 말하는 장면
5. 名前が戻っても、時間は戻りません。 [なまえが もどっても、じかんは もどりません]
이름이 돌아와도 시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명예가 회복되거나 진실이 밝혀져도 잃어버린 세월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을 말할 때 · 타카하시가 칸다역 앞에서 아카리에게 자신의 이름은 돌아왔지만 20년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