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회신
1화, 회신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2

눈은 아침까지 남아 있지 않았다.
밤새 그렇게 조용히 내리더니, 아침이 되자 도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젖은 도로만 남겨두고 있었다.
가로수 아래에는 하얗다기보다 회색에 가까운 물기가 고여 있었고, 사람들은 구두 끝을 조금 조심하며 걸었다. 사라졌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날 동양출판 우편함에도, 그런 식의 흔적 하나가 남아 있었다. 흰 봉투였다.
봉투 앞면에는 세이와미디어그룹의 회사명이 찍혀 있었고, 문서 제목란에는 굵은 글씨로 '공식답변'이라고 적혀 있었다.
타카하시는 그 봉투를 곧장 뜯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오래 기다린 것은 막상 도착하면 바로 열기가 어려웠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그것만 오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 같았는데, 막상 손에 쥐면 분명해진 뒤의 일이 두려워졌다.
그는 회의실에 혼자 들어가 봉투를 열었다.
첫 장은 정중했다. 회사와 회사 사이에 오가는 문장들은 대체로 정중했다. 그 정중함 때문에 정작 중요한 말은 더 늦게 보였다.
두 번째 장 중간에 受領記録(수령기록)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타카하시의 시선이 거기서 멈췄다.
1971년 11월 15일.
동양출판 영업기획부에서 보낸 기획서 1부를 세이와 영상기획실에서 수령한 기록이 확인됨.
그리고 비고란.
高橋案/渡辺氏経由(타카하시 안/와타나베 씨 경유)
타카하시는 그 줄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름은 종이 위에서 생각보다 조용했다.
하지만 이름이 스스로 소리를 내지 못한다 해서, 가볍게 읽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회의실 문이 열렸다.
와타나베 이사였다.
“답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타카하시는 종이를 덮지 않았다.
“네. 세이와 쪽 장부에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와타나베는 천천히 들어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는 늘 너무 반듯해서, 가끔은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예의인지 방어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시절 장부라는 게 다 그렇습니다. 누가 적었는지도 모르는 메모 하나로 뭘 판단하긴 어렵죠.”
“판단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확인하려는 겁니다.”
와타나베가 희미하게 웃었다.
“요즘 타카하시 부장님은 그 말을 자주 하시는군요. 확인.”
타카하시는 문서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확인도 늦으면 사과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와타나베의 손끝이 종이 위에 놓인 자신의 이름 쪽에서 멈췄다. 정확히는 이름이 아니라, ‘경유’라는 말 앞이었다. 직접 한 일과 자신을 거쳐간 일 사이. 책임과 우연 사이. 그런 말들은 늘 사람이 숨기 좋은 그늘을 만들었다.
“제 도장이 찍힌 발송 의뢰표가 있다고 해서, 그 기획이 누구 것이었는지까지 말해주는 건 아닙니다.”
“맞습니다.”
타카하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겠죠.”
“그럼 이걸로 뭘 하실 겁니까?”
타카하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예전 같았으면 물러섰을 것이다. 회사 일이니, 이제 와서 어쩌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래된 일이라고, 누구나 그때는 서툴렀다고, 말없이 접어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너무 오래 접어두면 원래대로 펼쳐 볼 수 없는 일도 있었다.
타카하시는 조용히 말했다.
“なかったことにはできません.”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타카하시의 한 마디가 회의실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오후가 되자, 같은 문서의 사본이 마루산상사 IT추진실 팩스에서 천천히 밀려 나왔다.
아카리는 출력된 종이를 받아 들고 주의깊게 읽었다.
단어들은 모두 짧았다. 그런데 짧은 단어들이 모이면, 사람이 숨 쉬는 방식까지 바뀌었다.
미사키가 지나가다 물었다.
“무슨 자료예요? 좀 무서운 표정을 하고 계세요.”
아카리는 종이를 반듯하게 내려놓았다.
“확인하던 게 하나 왔습니다.”
“좋은 소식이에요?”
“글쎄요. 좋은지 나쁜지보다, 정확한지가 먼저라서요.”
미사키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웃다가, 더 묻지 않았다.
아카리에게서 더 물으면 안 되는 선을 느낀 것이다. 때때로 말보다 침묵이 분명한 답변이 되곤 한다.
아카리는 문서 하단에 작은 메모를 붙였다.
‘세이와 공식 회신 도착. 동양출판 자료와 대조 필요. 감정 개입 금지.’
마지막 문장을 적고 나서, 그녀는 펜을 잠깐 멈췄다.
감정 개입 금지.
그건 회사 문서에 적기엔 조금 우스운 말이었다. 하지만 아카리는 알고 있었다. 기록을 다루는 일에는 감정이 너무 많이 들어가도 위험하고, 너무 없어도 위험했다. 사람의 이름이 걸린 자료 앞에서 완전히 차가워지는 사람은, 언젠가 다른 사람의 이름도 쉽게 지울 수 있었다.
그래서 아카리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곳에 서 있으려 했다.
그게 제일 어려웠다.
유이는 그날 세이와에서 답이 왔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동도대학 구내식당은 점심시간이 지나 한산했다. 친구들은 취업 세미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 회사가 여학생을 많이 뽑는다더라, 어느 회사는 일반직만 받는다더라, 면접에서 결혼 생각을 물었다더라.
유이는 종이컵 커피를 앞에 두고 노트를 보고 있었다.
‘미래는 누구의 것인가.’
‘이름이 떨어져 나간다는 말.’
‘도장은 책임의 또 다른 언어.’
‘말보다 문서, 문서보다 맥락.’
문장들은 흩어져 있었다.
졸업 작품의 제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아니, 제목보다 먼저 정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쓸 것인가.
아버지의 오래된 일을 졸업 작품으로 다루는 순간, 유이는 취재자이자 딸이 되었다. 둘 중 하나만 되는 일은 쉬웠다. 둘 다 되는 일은 자꾸 손이 떨렸다.
저녁 아르바이트 근무를 위해 들른 편의점 계산대 아래에는 인수인계 노트가 놓여 있었다.
켄타의 글씨였다.
‘복사용지 채워두었습니다. 우유 폐기 시간 확인했습니다. 잡지 반품 1묶음 남아 있습니다.’
문장 끝에는 작게 이렇게 덧붙어 있었다.
‘오늘은 길이 미끄럽습니다.’
유이는 그 문장을 보고 웃었다.
말없이 남겨진 걱정은, 가끔 대놓고 하는 걱정보다 오래 따뜻했다.
유이는 그 아래에 답장을 적었다.
‘고마워. 내일은 내가 먼저 채워둘게.’
그게 그날 두 사람 사이의 전부였다.
만나지 않았지만, 같은 계산대와 같은 노트를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짧은 회신을 남겼다.
사람들은 꼭 얼굴을 보고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밤 9시가 조금 넘어, 니시오기쿠보의 집 현관문이 열렸다.
“다녀왔어.”
타카하시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유이는 거실에서 고개를 들었다.
“늦었네.”
“응. 회사에 일이 좀 있었어.”
그는 코트를 벗고 한참 말이 없었다. 유이는 그 침묵이 그냥 피곤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요즘 아버지의 침묵에는 종류가 있었다. 쉬고 싶은 침묵, 말하고 싶은데 고르는 침묵, 그리고 이미 말하기로 정했지만 아직 첫 문장을 찾지 못한 침묵.
오늘은 세 번째였다.
유이가 먼저 물었다.
“세이와에서 답 왔어?”
타카하시는 놀라지 않았다.
딸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왔어.”
“뭐래?”
“네가 본 그 잘린 이름, 아마 내 이름이 맞아.”
유이는 숨을 작게 들이켰다.
타카하시는 식탁 의자를 빼 앉았다.
“그리고 그 기획서가 세이와에 넘어간 기록도 있었어.”
“그럼...”
유이는 말을 멈췄다.
와타나베라는 이름을 바로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그 이름이 날카롭게 느껴질 것 같았다.
타카하시가 조용히 말했다.
“아직 누굴 탓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기록이 있잖아.”
“기록은 시작이지, 결론은 아니야.”
유이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 말이 답답했다.
하지만 동시에 맞는 말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졸업 작품에 써도 돼?”
타카하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회사 자료라서 지금은 그대로 쓸 수 없어. 그리고 네가 쓰게 되면, 내 이야기가 아니라 네 이야기가 되기도 해.”
“그게 무서워?”
“응.”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조금 무서워.”
유이는 아버지가 무섭다고 말하는 것을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늘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조용한 것과 무섭다고 말하는 것은 달랐다.
“그래도 네 질문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타카하시가 말했다.
“다만 천천히 했으면 해. 이름을 돌려주려다가 다른 이름을 다치게 할 수도 있으니까.”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끝난 뒤에도 두 사람은 한참 식탁에 앉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어색해서 각자 방으로 들어갔을 텐데, 오늘은 아무도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침묵이 꼭 멀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두 사람은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그날 밤, 와타나베는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복사기는 이미 식어 있었고, 복도 불은 절반쯤 꺼져 있었다.
그는 회신 사본을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손끝이 비고란 위에 멈췄다.
高橋案/渡辺氏経由(타카하시 안/와타나베 씨 경유)
그는 그 줄을 가만히 바라 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과거를 기억한다.
와타나베도 그랬다. 그에게 1971년은 단순한 배신의 해가 아니었다. 젊었고, 급했고, 뒤처지기 싫었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가 남의 말을 자기 말처럼 빌려 쓰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견딜 만했다.
하지만 문서는 사람을 이해해주지 않았다.
문서는 그저 남아 있었다.
와타나베는 낡은 주소록을 꺼내 번호 하나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 그는 낮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세이와 쪽 회신, 누가 확인했습니까?”
창밖으로는 눈이 다 녹은 도쿄가 보였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젖은 도로만 빛났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알고 있었다.
눈은 녹아도, 젖은 자국은 한동안 남는다.
유이는 잠들기 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노트 첫 장에 제목을 적으려다 지우고, 다시 적으려다 멈췄다. 방문이 살짝 열리더니 타카하시가 작은 메모지를 책상 위에 놓았다.
“뭐야?”
“그냥.”
그는 더 말하지 않고 나갔다.
메모지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返事は急がなくていい. (답은 서두를 필요가 없어.)
유이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답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피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날 도쿄에는 여러 종류의 회신이 있었다.
세이와가 동양출판에 보낸 공식 회신.
아카리가 자료 위에 붙인 건조한 메모.
켄타와 유이가 인수인계 노트에 남긴 짧은 답장.
타카하시가 딸에게 남긴, 서두르지 말라는 문장.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회신도 있었다.
와타나베가 과거에게 걸어놓은 전화.
유이가 자기 자신에게 아직 쓰지 못한 대답.
아카리가 다음 대조표에 남겨둘 빈칸.
눈은 녹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아무도 완전히 모르는 척할 수는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