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부양가족
3화, 부양가족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2

사람을 가장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질문이 아닐 때가 있었다.
빈칸이었다.
이름을 쓰는 칸.
생년월일을 쓰는 칸.
관계를 쓰는 칸.
그리고 아무 설명 없이 도장을 찍어야 하는 칸.
질문은 모른 척할 수라도 있었다. 하지만 칸은 달랐다. 비워두면 비워둔 대로, 채우면 채운 대로 사람을 설명하게 만들었다.
마루산상사 총무부에서 연말 서류가 내려온 것은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오늘 중으로 부탁드립니다.”
총무부 여직원은 그렇게 말하며 부서마다 갈색 봉투를 돌렸다. 봉투 안에는 직원별 서류가 들어 있었다.
이름과 사원번호가 찍혀 있었고, 아래쪽에는 제출 기한이 빨간 펜으로 동그랗게 표시되어 있었다.
年末調整(연말정산).
아카리는 봉투를 받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연말정산이라는 말은 늘 이상했다.
일 년 동안 번 돈과 낸 세금과 가족의 이름을 다시 맞춰보는 일. 회사는 그것을 정산이라고 불렀지만, 아카리에게는 가끔 심문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봉투를 열었다.
扶養控除申告書(부양공제 신고서).
용지는 얇았고, 칸은 많았다.
아카리는 검은 볼펜을 꺼내 이름을 적었다.
中村 明里 (나카무라 아카리.)
주소. 생년월일. 사원번호.
그다음 칸에서 손이 잠깐 멈췄다.
扶養親族(부양가족).
그녀는 천천히 썼다.
中村 健太(나카무라 켄지)
長男(장남)
1976年3月生
적고 나니 종이 위에 켄타가 너무 쉽게 올라와 있었다.
아침마다 계란말이를 먹고, 밤에는 편의점 유니폼 냄새를 묻혀 돌아오고, 진로 희망 조사서 앞에서 오래 연필을 굴리던 아이. 그 아이가 회사 서류 위에서는 한 줄이었다.
아카리는 그 한 줄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때 미사키가 종이컵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
“나카무라 주임님, 서류 다 쓰셨어요?”
“아직입니다.”
“저는 이런 거 매년 헷갈려요. 배우자 칸이랑 부양가족 칸이랑, 봐도 봐도 모르겠고.”
미사키는 웃으며 아카리 책상 옆에 섰다. 웃음은 가벼웠다. 그런데 시선은 가볍지 않았다.
아카리는 자연스럽게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
“필요하시면 총무부에 물어보시는 게 정확할 겁니다.”
“아, 그렇죠.”
미사키는 물러나는 듯하다가, 서류 한쪽을 힐끗 보았다.
“켄타 군, 고등학생이라고 했죠?”
아카리의 손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네.”
“그럼 벌써 꽤 컸네요.”
“그렇죠.”
“나카무라 주임님은 아직 젊어 보이는데.”
말은 칭찬처럼 나왔다.
하지만 칭찬은 가끔 칼집을 씌운 질문과도 같았다.
아카리는 고개를 들었다.
“사적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
미사키는 잠깐 멈췄다가 웃었다.
“아, 미안해요. 그냥 신기해서요.”
“괜찮습니다.”
아카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괜찮지는 않았다.
괜찮다는 말은 편리했다.
상대가 더 묻지 않게 하고, 나도 더 설명하지 않게 하는 말. 하지만 그 말은 마음을 보호해주지는 못했다.
미사키가 돌아간 뒤, 아카리는 배우자 칸을 보았다.
配偶者(배우자).
그 칸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칸은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장 많은 말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사무실 안에는 복사기 소리와 전화벨 소리가 섞였다. 사람들은 연말 보너스 이야기를 낮은 목소리로 했다. 작년보다 적을 것 같다느니,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느니, 회사가 어렵다고 해도 우리 부서는 버틸 거라느니.
1991년의 도쿄에서는 다들 조금씩 숫자에 민감해지고 있었다.
월급명세서의 공제액, 도시락값, 전철 정기권, 아이 학원비, 집세.
큰 불황은 뉴스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지갑 속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아카리는 서류를 봉투에 넣어 총무부로 가져갔다.
총무부 여직원은 서류를 받아 확인 도장을 찍었다.
탁.
도장이 찍히자, 아카리는 이상하게 어깨가 무거워졌다.
동양출판의 오래된 발송 의뢰표 위에 찍힌 도장도, 세이와 수령 장부에 남은 도장도, 켄타의 진로 희망 조사서에 찍은 자신의 도장도 떠올랐다.
도장은 작았다.
하지만 사람을 어디에서건 끌고 오는 힘이 있었다
오후 3시 무렵, 아카리는 복사실 앞에서 발을 멈췄다.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카무라 주임 아들, 고등학생이라며?”
“나도 그 얘기 들었어. 계산해보면 거의 아들 나이에...”
거기서 말이 끊겼다.
아카리는 문을 열지 않았다.
그냥 돌아섰다.
소문은 늘 계산을 좋아했다.
자초지종은 빼고, 숫자만 더했다. 몇 살에 낳았는지, 남편은 있는지, 왜 말하지 않았는지. 숫자는 정확해 보였지만, 정확한 숫자가 늘 정확한 사정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자리로 돌아온 아카리는 동양출판 대조표 파일을 열었다.
確認済(확인 완료).
確認中(확인 중).
要確認(확인 필요).
그녀는 화면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기록은 사람을 지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록은 사람을 드러낼 수도 있었다.
어제까지 그녀는 기록이 지워진 이름을 되찾아주는 쪽이라고 믿었다. 오늘은 조금 달라졌다. 기록은 때때로 숨고 싶은 사람의 어깨를 붙잡아 세우기도 했다.
그렇다면 기록을 다루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함만이 아니었다.
조심스러움.
아카리는 모니터 옆 메모지에 작게 적었다.
‘정확한 것과 잔인하지 않은 것은 함께 가야 한다.’
그날 오후, 유이는 동도대학 연구실에서 지도교수를 만났다.
교수는 유이의 수정 기획서를 읽고 있었다. 연필로 몇 군데 줄을 긋고, 제목 옆에는 물음표를 하나 남겼다.
“방향은 좋아. 그런데 이제부터는 동의가 필요해.”
“동의요?”
“응. 가족 이야기가 들어간다면 더더욱. 자료로 쓸 수 있다고 해서,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교수는 책상 서랍에서 얇은 양식을 꺼냈다.
同意書(동의서).
유이는 그 종이를 받아 들었다.
종이 위에는 성명, 관계, 사용 범위, 서명란이 있었다.
지도교수는 조용히 말했다.
“쓸 수 있는 것과 써도 되는 것은 다르다. 그걸 구분하는 게 취재자에게는 중요해.”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쓸 수 있는 것과 써도 되는 것.
아버지의 이름도, 1971년의 기획서도, 세이와의 장부도, 모두 쓸 수는 있었다. 하지만 써도 되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누군가의 이름을 돌려주려다가,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함부로 열어젖힐 수도 있었다.
그날 저녁, 유이는 집으로 돌아와 식탁 위에 동의서를 올려두었다.
타카하시는 서류를 보고 안경을 고쳐 썼다.
“이건 뭐니?”
“졸업 작품에 아빠 이야기가 들어가게 될 수도 있잖아. 교수님이 동의서를 받는 게 좋대.”
타카하시는 종이를 천천히 읽었다.
성명. 관계. 사용 범위. 서명.
한참 뒤 그가 말했다.
“바로 써도 되지만, 오늘은 읽어볼게.”
“응. 천천히 해.”
“서두르지 말라고 한 건 나였는데, 네가 먼저 배웠네.”
유이는 작게 웃었다.
타카하시는 동의서를 접지 않고, 식탁 한가운데에 그대로 두었다.
그 종이는 예전의 회신서나 발송 의뢰표와 달랐다. 누군가 몰래 지나간 흔적이 아니라, 지금부터 같이 정하자는 종이였다.
그게 조금 위로가 되었다.
코토구의 작은 집에 아카리가 돌아왔을 때, 켄타는 식탁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낮은 볼륨으로 음악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DJ가 요즘 인기 있는 8센티미터 싱글을 소개했고, 켄타는 별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귀는 라디오 쪽을 향해 있었다.
“ただいま。(다녀왔어.)”
“おかえり。(어서 와.)”
아카리는 외투를 벗고 부엌으로 갔다. 평소 같으면 바로 냄비에 물을 올렸을 텐데, 오늘은 싱크대 앞에서 잠깐 멈췄다.
켄타가 그걸 보았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닌 얼굴이 아닌데.”
아카리는 피식 웃었다.
“언제 그렇게 눈치가 늘었어?”
“엄마랑 살면 늘어.”
그 말에 아카리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켄타는 연필을 내려놓고 물었다.
“내 생년월일 쓰는 거, 회사에서 곤란해?”
아카리는 천천히 돌아섰다.
“누가 뭐라고 했어?”
“아니. 그냥. 그런 거 쓸 때마다 엄마 표정이 좀 달라져.”
아카리는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침묵 속으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켄타.”
“응.”
“너 때문에 곤란했던 적은 없어.”
켄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카리는 말을 고르다가, 조금 더 천천히 말했다.
“곤란했던 건 사람들이었어. 사람들이 묻는 방식. 계산하는 방식. 설명하라고 하는 방식.”
켄타는 손끝으로 지우개를 굴렸다.
“그럼 나는 엄마한테 안 곤란한 사람이야?”
아카리의 목이 잠깐 메었다.
“너는...”
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너는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야.”
켄타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말은 좀...”
“부담스러워?”
“응.”
“미안.”
“근데 싫지는 않아.”
아카리는 그제야 조금 웃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말은 늘 어렵다.
너무 많이 말하면 짐이 되고, 너무 안 말하면 벽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일 조금씩 실패하면서, 다시 식탁 앞에 앉았다.
아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냄비에 물을 올렸다.
“오늘은 우동 먹을래?”
“응.”
“계란 넣어?”
켄타가 잠깐 생각했다.
“하나만.”
“두 개 넣어줄게.”
“그럼 물어보지 마.”
아카리는 웃었다.
그 웃음은 오늘 회사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웃음이었다.
밤이 깊어갈 무렵, 마루산상사 복도 끝 자동판매기 앞에서 미사키는 종이컵 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총무부 여직원이 지나가자, 미사키가 가볍게 말을 걸었다.
“나카무라 주임, 가족이 고등학생 아들 하나죠?”
총무부 여직원은 애매하게 웃었다.
“서류 내용은 말하면 안 되죠.”
“아, 그렇죠. 미안해요. 그냥 전에 들은 것 같아서.”
미사키는 웃으며 물러났다.
그 말은 질문처럼 나갔지만, 복도에서는 이미 답처럼 들렸다.
소문은 대체로 그렇게 시작됐다.
누군가 확실히 말하지 않았는데도, 모두가 들은 것처럼 되는 방식으로.
그날 밤, 아카리는 켄타가 잠든 뒤 식탁에 앉아 있었다.
부양공제 신고서 사본은 없었다. 회사에 제출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그 종이가 아직 손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작은 수첩을 꺼내 한 줄을 적었다.
‘내가 지키고 싶은 이름도, 누군가에게는 캐고 싶은 정보가 된다.’
펜을 내려놓고 한참 뒤, 아카리는 다시 적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남의 이름도, 내 이름도.’
창밖으로 도쿄의 겨울밤이 조용히 깊어가고 있었다.
눈은 오지 않았다. 대신 녹은 눈이 지나간 자리처럼, 마음 한쪽이 조금 젖어 있었다.
부양가족이라는 말은 이상했다.
누가 누구를 부양하는지, 서류는 간단히 적었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아카리가 켄타를 먹여 살렸고,
켄타는 아카리가 무너지지 않게 붙잡았다.
서류에는 그런 칸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은 가끔, 칸 밖에서 살아남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