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니혼고 프렌즈 홈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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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5 · 읽는 시간 약 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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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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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는 허락과 조금 달랐다.

허락은 “그래도 된다”에 가까웠지만, 동의는 그보다 조금 더 오래 생각해야 하는 말이었다.

어디까지 괜찮은지, 어디서부터는 멈춰야 하는지, 무엇을 말해도 되고 무엇은 아직 말하면 안 되는지.

그러니까 좋은 동의에는 늘 경계선이 있었다.

유이는 아침 식탁 위에 동의서를 다시 펼쳐놓았다.
어젯밤 아버지가 읽어보겠다고 한 그 종이였다.

타카하시는 커피잔을 옆에 두고,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使用範囲(사용 범위).

“여기가 비어 있네.”

“응. 거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제일 중요한 칸인데?”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싫으면 안 쓸게.”

타카하시는 딸을 바라보았다.

“싫어서가 아니야. 빈칸에 서명하기가 조심스러운 거지.”

그 말이 유이에게는 이상하게 어른답게 들렸다.
어른답다는 건 겁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겁이 나는 부분을 정확히 아는 쪽에 가까웠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 회사명은 익명 처리하고, 실명은 졸업 작품 안에 넣지 않는 걸로. 아빠 이야기도 ‘사례’로만 다루고.”

타카하시는 잠깐 생각했다.

“나는 네가 나를 지켜주려고 이걸 쓰는 건 원하지 않아.”

“그럼?”

“사실을 지키려고 써. 사람은 그다음이야.”

유이는 펜을 들었다.

사용 범위.
‘실명 비공개. 자료의 흐름과 기록 누락의 구조를 중심으로 서술. 당사자 확인 전 인용 금지.’

쓰고 보니 문장이 너무 딱딱했다.

하지만 딱딱한 문장도 때로는 사람을 보호했다.

타카하시는 그 문장을 한참 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괜찮겠다.”

그는 이름 옆에 날짜를 적고, 서명란에 펜을 댔다.
종이 위에 아버지의 이름이 적히는 동안, 유이는 숨을 조금 참았다.

도장을 찍는 소리보다 조용했지만, 그 서명도 분명한 소리를 냈다.
이제부터는 혼자 쓰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소리.

그날 동양출판에서는 세이와 회신의 처리 범위를 두고 짧은 회의가 열렸다.

와타나베 이사는 문서 사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대외비로 취급하는 게 맞습니다.”

타카하시는 종이를 보았다.
거기에는 여전히 같은 줄이 있었다.

高橋案/渡辺氏経由. ( 타카하시안, 와타나베 씨 경유.)

“대외비로 관리하는 건 동의합니다. 다만 보존과 검토는 계속해야 합니다.”

와타나베는 작게 웃었다.

“요즘은 모두 선을 긋는군요.”

“선을 긋지 않으면, 나중에 누가 넘어왔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회의실 구석에 앉아 있던 아카리는 그 말을 조용히 받아 적었다.

보존. 검토. 공개 제한. 사용 범위.

예전 같으면 이런 단어들이 전부 행정용어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달랐다. 그 단어들 안에는 사람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누가 보호받고, 누가 지워지고, 누가 말할 기회를 잃는지.

와타나베가 아카리 쪽을 보았다.

“나카무라 주임, 외부 협력사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아카리는 잠시 펜을 멈췄다.

“자료 자체는 대외비로 제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한했다는 기록은 남겨야 합니다.”

“제한했다는 기록까지요?”

“네. 나중에 누가 보더라도 왜 공개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어야 하니까요.”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카리는 더 말하지 않았다.
요즘 그녀는 말을 덜 하는 대신, 필요한 문장만 남기려 했다. 설명은 길어질수록 감정처럼 보일 때가 있었고, 감정처럼 보이는 순간 회사는 그것을 쉽게 밀어냈다.

오후가 되자 마루산상사에도 비슷한 종류의 선이 필요해졌다.

복사실 앞에서였다.

아카리가 복사지를 채우고 있는데, 미사키가 들어왔다. 손에는 커피가 없었다. 이상하게 그런 날의 미사키가 더 조심스러워 보였다.

“나카무라 주임님.”

“네.”

“제가 이런 말 하는 거 좀 그렇긴 한데요.”

그 말은 대체로 정말 그런 말을 하려는 사람이 꺼내는 말이었다.

아카리는 복사기 뚜껑을 닫았다.

“말씀하세요.”

“요즘 이상한 얘기가 돌아요. 주임 아드님 나이랑... 뭐, 그런 거요. 제가 깔끔하게 정리해드릴 수도 있고.”

정리해준다.

그 말이 아카리의 귀에 이상하게 차갑게 닿았다.
남의 이야기를 정리해준다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기는지 몰랐다.

“정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근데 그냥 두면 더 이상하게 퍼질 수도 있잖아요.”

아카리는 미사키를 똑바로 보았다.

“이제부터는 당사자에게 확인하게 두세요.”

미사키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아카리는 또박또박 천천히 덧붙였다.

“제 사적인 일은 제가 말할 수 있는 만큼만 말하겠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 입으로 정리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복사실 안에는 기계가 식는 소리가 났다.
미사키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미안해요.”

“네.”

아카리는 복사지 묶음을 들고 나왔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하지만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선을 긋는 일은 늘 멋있게 되지 않았다.
가끔은 아주 작은 복사실에서, 겨우 떨리는 손을 숨기며 하게 되었다.

그날 켄타의 교실에도 하나의 선이 필요했다.

종례 시간, 담임이 프린트를 나눠주었다.

“다음 주부터 보호자 면담 시작한다. 원하는 시간 적어 와.”

교실이 술렁였다.
누군가는 귀찮다고 했고, 누군가는 엄마가 또 성적 얘기할 거라며 한숨을 쉬었다. 켄타는 프린트 위쪽을 가만히 보았다.

보호자 면담.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카리는 보호자였다. 누구보다 그랬다. 다만 학교에서 보호자라는 말은 너무 간단했다. 실제 집에서 그 말은 밥, 전기세, 진로 조사서, 야간 아르바이트 걱정, 그리고 말하지 않는 과거까지 전부 포함했다.

다카기가 옆에서 물었다.

“너희 어머니 오셔?”

“아마.”

“우리 엄마는 담임보다 더 많이 말해. 면담인지 강연인지 모르겠다니까.”

켄타는 웃었다.
그런 평범한 불평이 조금 부러웠다.

집에 가는 길, 켄타는 프린트를 가방 안 깊숙이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숨긴다고 없어지는 종이는 없었다. 오히려 숨긴 종이일수록 더 크게 바스락 소리를 낸다.

세이와미디어그룹 홍보부에서는 유이에게 봉투 하나가 발송됐다.

오오츠카가 직접 확인한 봉투였다. 안에는 추가 취재 일정 안내와 함께 얇은 서류가 들어 있었다.

守秘義務(비밀유지 의무).
사용 범위. 인용 가능 범위. 사내 자료의 외부 공개 제한.

오오츠카는 봉투를 닫기 전 잠시 손을 멈췄다.

기록을 막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록이 사람을 다치게 하는 방식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개발부의 혼마가 지나가다 물었다.

“그거 유이 학생한테 가는 겁니까?”

“네. 추가 취재 전에 서류를 보내려고요.”

“두껍네요.”

“필요한 절차예요.”

혼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절차가 늘 나쁜 건 아니죠. 문제는 절차 뒤에 숨는 사람들이고.”

오오츠카는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혼마 씨도 이번엔 절차 안에서 말해주세요.”

“노력하겠습니다.”

“노력 말고요.”

혼마는 작게 웃었다.

“그럼, 지키겠습니다.”

그 대답이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오츠카는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저녁 무렵, 유이는 학교 우편함에서 세이와 봉투를 받았다.

봉투 안의 문장을 읽을수록, 그녀는 아침의 동의서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동의서는 함께 정한 선이었다.
세이와의 서류는 회사가 정한 선이었다.

둘 다 선이었지만, 온도는 달랐다.

유이는 도서관 창가에 앉아 서류 한쪽에 연필로 표시했다.

‘사내 자료 직접 인용 불가.’ ‘개인명 익명 처리.’ ‘추가 취재 내용은 확인 후 사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유이는 알고 있었다. 선이 생기면, 사람은 그 선을 넘고 싶은 충동과 그 선 뒤에 숨고 싶은 충동을 동시에 갖게 된다.

중요한 건 선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선을 누가 왜 그었는지였다.

밤이 되어 코토구의 작은 집에 아카리가 돌아왔을 때, 켄타는 식탁 위에 프린트를 올려두고 있었다.

“이거.”

아카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종이를 보았다.

보호자 면담 안내.

“언제까지 내야 해?”

“금요일.”

“희망 시간은?”

켄타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엄마 편한 시간.”

아카리는 그 말이 고마우면서도 조금 아팠다.
아이가 부모의 시간을 먼저 계산하는 집에서는, 아이가 조금 빨리 어른이 된다.

“엄마는 켄타 학교에 가는 거 괜찮아.”

켄타는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회사에서 또 내 얘기하게 될 텐데도?”

“회사 사람들은 상관없어.”

“그래도...”

아카리는 켄타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 회사에서 선 하나 그었어.”

켄타가 고개를 들었다.

“선?”

“내 얘기는 내가 말하겠다고. 남이 정리하지 말라고.”

켄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잘했네.”

아카리는 웃었다.

“엄마한테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잘한 건 잘했다고 해야지.”

그 말에 아카리는 웃지 못했다.
대신 프린트 아래쪽 희망 시간 칸에 화요일 오후 5시라고 적었다.

“화요일은 조금 일찍 나올 수 있어.”

“무리 안 해도 돼.”

“무리 아니야.”

“맨날 그렇게 말하잖아.”

“이번엔 진짜.”

켄타는 믿는다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같은 밤, 니시오기쿠보의 집에서는 유이가 아버지에게 세이와 서류를 보여주었다.

타카하시는 천천히 읽었다.

“비밀유지 의무 조항이 있네.”

“응. 추가 취재 받으려면 서명해야 해.”

“불편해?”

“조금. 그런데 필요하다는 것도 알아.”

타카하시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네가 오늘 아침 내 동의서에 쓴 것과 비슷하네. 어디까지 쓸 건지 정하는 일.”

“근데 아빠랑 정한 선은 같이 만든 것 같았고, 이건 회사가 만든 것 같아.”

“회사도 사람이 만들었지.”

유이는 아버지를 보았다.

타카하시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더 조심해야 해. 회사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이 있고, 회사때문에 할 말을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유이는 세이와 서류와 아버지의 동의서를 나란히 놓았다.

두 종이는 닮아 있었다.
칸이 있고, 조건이 있고, 서명란이 있었다.

하지만 한쪽은 딸이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내민 종이였고, 다른 한쪽은 회사가 학생에게 건넨 종이였다.

유이는 펜을 들고 세이와 서류의 빈칸을 채웠다.

사용 목적 : 졸업 작품 취재.
사용 범위 : 익명화 후 분석 자료로 활용.
서명.

펜 끝이 마지막 줄에서 잠깐 멈췄다.

서명은 작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작은 결정들이 모여 사람을 어느 방향으로 데려갔다.

유이는 이름을 적었다.

高橋由依. (타카하시 유이)

그날 밤, 도쿄의 여러 곳에서 선이 그어졌다.

동양출판에서는 공식 회신의 사용 범위가 정해졌고,
마루산상사 복사실에서는 아카리가 사생활에 대한 경계를 세웠고,
켄타의 식탁 위에는 보호자 면담 시간이 정해졌으며,
유이의 책상 위에는 두 장의 서류가 나란히 놓였다.

선은 벽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그으면, 길이 되기도 했다.

넘지 말아야 할 곳을 알려주고,
함부로 들어오지 말아야 할 곳을 지켜주고,
그리고 때로는 같이 넘어가도 되는 사람을 알아보게 해주었다.

유이는 불을 끄기 전 노트에 한 줄을 적었다.

‘기록은 남기는 일이고, 동의는 함께 남기로 하는 일이다.’

창밖의 도쿄는 여전히 밝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 밝음이 조금 덜 무섭게 느껴졌다.

어디까지 쓸 것인지 정한 사람은,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도 조금은 알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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