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늘 마시던 걸로
9화, 늘 마시던 걸로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2

검은 줄이 그어진 원고가 돌아온 뒤에도 사람들은 낮에 평소처럼 일했다.
유이는 학교에서 원고를 고쳤고, 켄타는 편의점 인수인계 노트에 분실물 확인 절차를 다시 적었다.
아카리는 동양출판 공개용 목록과 보존용 목록을 나눠 정리했고, 타카하시는 회의실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음 일정표를 넘겼다.
하지만 낮에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은 밤이 되면 조금씩 무거워졌다.
칸다역 뒤편, 큰길에서 두 골목쯤 들어가면 작은 스낵이 하나 있었다.
간판에는 흰 글씨로 雪(눈)이라고 적혀 있었다. 눈이 많이 오는 동네도 아닌데, 그 가게만은 일 년 내내 눈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아카리는 퇴근길에 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집에 곧장 가면 켄타가 물을 것이다.
“오늘도 바빴어?”
그러면 아카리는 “일이 좀 있었어”라고 대답할 것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늘 같은 대답은 가끔 거짓말보다 더 사람을 지치게 했다.
아카리는 문을 열었다.
작은 종이 울렸다. 카운터 안쪽에서 잔을 닦던 마마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풀어 주었다. 회사에서 듣는 ‘수고하셨습니다’와는 달랐다. 결재도, 보고도, 다음 일정도 붙어 있지 않은 말이었다.
마마는 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늘 마시던 걸로?”
아카리는 코트를 벗으며 웃었다.
“미즈와리, 연하게요.”
“오늘도 정신은 챙겨서 돌아가시겠다?”
“챙길 정신이 남아 있으면요.”
마마는 얼음을 두 개만 넣었다. 위스키는 조금, 물은 넉넉히.
아카리가 술마신 티를 내고싶지 않을 때 늘 고르는 방식이었다.
가게 안에는 손님이 둘뿐이었다. 한 명은 구석에서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노래방 책을 펼쳐 놓은 채 졸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소리를 낮춘 채 야구 재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카리는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오늘 표정은 마치 종이에 베이기라도 한 표정이같네.”
마마가 말했다.
“종이에 베이면 피라도 나죠. 사람한테 베이면 티가 안 나요.”
“그래서 술집이 있는 거야. 티 안 나는 사람들 앉아 있으라고.”
아카리는 대답 대신 한 모금 마셨다. 술은 거의 물 같았지만, 목을 지나갈 때만큼은 분명히 어른의 맛이 났다.
잠시 뒤, 문이 다시 열렸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타카하시가 들어왔다. 그는 문 앞에서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아카리를 보고 조금 놀란 듯했지만, 곧 평소처럼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뵙네요.”
아카리도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게요.”
마마는 두 사람 사이를 한 번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타카하시에게도 같은 말을 건넸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타카하시는 짧게 웃었다.
“네. 오늘은 그 말이 좀 필요했습니다.”
“늘 마시던 걸로?”
“오늘은 조금만요.”
마마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꺼냈다.
타카하시는 아카리와 한 자리 띄워 앉았다. 회사 회의실에서는 마주 앉아야 하는 사람들이, 술집에서는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그게 어쩐지 이상했고, 조금 편했다.
“일 얘기는 하지 말까요?”
아카리가 먼저 말했다.
타카하시가 잔을 받으며 대답했다.
“그럴 생각으로 왔습니다.”
마마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치고 진짜 안 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들킨 사람들처럼.
술집의 침묵은 회의실의 침묵과 달랐다. 회의실의 침묵은 누가 먼저 책임질 것인지 기다리는 시간이었고, 술집의 침묵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에 가까웠다.
아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따님 원고는 계속 고치고 있습니까?”
“네. 검은 줄이 더 많아졌다고 하더군요.”
아카리는 잔 속 얼음을 바라보았다.
“가리면 보호가 되기도 하고, 삭제가 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어렵습니다.”
“부장님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세요?”
타카하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유리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났다.
“가린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아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켄타가 편의점 분실물 이름을 봉투 밖에 안 썼대요. 아무나 볼까 봐요.”
“좋은 판단입니다.”
“그런데 그 애가 묻더라고요. 이름을 안 보이게 하면 찾기 어려워지는 거 아니냐고.”
타카하시는 낮게 웃었다.
“요즘 아이들은 숨기는 법보다 확인하는 법을 먼저 배우는 것 같습니다.”
“다행인 걸까요.”
“무서울 때도 있고, 다행일 때도 있죠.”
마마가 두 사람 앞에 작은 접시를 놓았다. 간장에 조린 무와 어묵이었다.
“어른들이 너무 오래 숨기면 애들이 대신 찾게 돼요. 그거, 애들한테 미안한 일이야.”
아카리는 마마를 보았다.
“마마는 가끔 너무 정확해요.”
“술값에 포함된 서비스야.”
가게 안에 작게 웃음이 번졌다.
타카하시는 접시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말했다.
“유이가 제게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합니다.”
아카리는 그를 쳐다보았다.
“하실 건가요?”
“피할 수는 없겠죠.”
“피하고 싶으세요?”
“아버지로서는 피하고 싶고, 기록에 남은 사람으로서는 피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의 타카하시는 늘 문서 앞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문서가 아니라 딸 앞에 서는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저는 켄타가 제 일을 너무 많이 알까 봐 걱정될 때가 있어요.”
“왜요?”
“아직 열다섯이니까요. 어른들이 남긴 찌꺼기 같은 걸 벌써 알 필요는 없잖아요.”
타카하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우리가 숨긴다고 모르는 게 아니더군요. 모르는 척해 줄 뿐이지.”
아카리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 말은 아팠다. 하지만 정확했다.
켄타는 자주 모르는 척을 했다. 아카리가 월급날 봉투를 오래 들여다보는 것도, 학교에서 보호자란에 혼자 이름을 쓰는 것도, 밤에 설거지를 하다가 한숨을 삼키는 것도. 켄타는 모르는 척해 주는 방식으로 아카리를 지켜 주고 있었다.
그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마마가 물을 더 부어 주며 말했다.
“옛날에도 여기서 그런 얘기 많이 했어.”
“어떤 얘기요?”
타카하시가 물었다.
마마는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래된 기억을 꺼내는 사람처럼.
“출판사 사람들, 영상 만드는 사람들, 음악 쪽 사람들. 다들 젊었지. 술은 약하면서 말은 커서, 책이 밖으로 나간다느니, 이야기가 다른 몸을 입는다느니.”
아카리와 타카하시는 동시에 말이 없어졌다.
마마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손을 내저었다.
“나한테 증거 같은 거 찾지 마. 술집에서 들은 말은 영수증이 아니야.”
타카하시가 천천히 말했다.
“증거가 아니라 계기일 수도 있습니다.”
“계기도 조심해야 해요.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도 하지만, 엉뚱한 데로 데려가기도 하니까.”
아카리는 마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작은 가게에도 시간이 쌓여 있었다. 서류철도, 등록번호도 없지만, 누군가의 피로와 허세와 실패한 농담이 잔 밑에 조금씩 말라붙어 있었다.
그때 아카리의 시선이 시계로 갔다.
“가 봐야겠네요. 켄타 돌아올 시간이라.”
“알았어. 오늘은 딱 한 잔. 훌륭하네.”
“칭찬받을 일까지는 아니고요.”
“어른이 한 잔에서 멈추는 건 칭찬받을 일이야.”
아카리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카하시도 고개를 숙였다.
“내일 뵙겠습니다.”
“회사에서는 오늘 얘기 안 한 걸로 해 주세요.”
“저도 그러려고 합니다.”
문을 열자 찬 공기가 들어왔다. 아카리는 코트를 여미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같은 시각, 오차노미즈 근처 편의점에서는 켄타가 유이에게 계산대를 넘기고 있었다.
켄타는 인수인계 노트를 닫다가 잠깐 머뭇거렸다.
“유이 누나는 어른들이 힘들면 어디 간다고 생각해요?”
유이는 뜻밖의 질문에 웃었다.
“갑자기?”
“그냥요. 다들 집에 바로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유이는 계산대 옆에 놓인 따뜻한 캔커피를 정리했다.
“우리 아빠는 가끔 늦게 들어와. 술을 많이 마시는 건 아닌데, 그런 날은 말이 좀 느릿느릿해지셔.”
“좋은 거예요?”
“나쁜 건 아닌 것 같아. 집에 바로 가져오면 너무 무거운 말들이 있잖아. 어디선가 조금 내려놓고 오는 거겠지.”
켄타는 그 말을 생각했다.
“그럼 우리 엄마도 좀 내려놓고 왔으면 좋겠어요.”
“아카리 씨는 잘 내려놓을 것 같은데?”
“아니요. 엄마는 내려놓는 척하면서 다시 들고 와요.”
유이는 조용히 웃었다.
“그건 우리 아빠도 그래.”
두 사람은 잠깐 아무 말 없이 편의점 안을 보았다. 형광등은 환했고, 손님들은 잠깐씩 들어왔다가 나갔다. 이곳도 누군가에게는 지나가는 장소였지만, 켄타와 유이에게는 서로의 하루가 몇 분씩 겹치는 자리였다.
“수고했어. 조심히 가.”
유이가 말했다.
켄타는 가방을 메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도 무리하지 마세요.”
“너도.”
켄타가 나가고, 유이는 인수인계 노트 맨 아래에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분실물 이름은 밖에 쓰지 않음. 확인은 본인에게 직접.’
그 문장을 적고 나니, 어쩐지 자기 원고의 검은 줄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타카하시는 아카리가 나간 뒤에도 한동안 더 앉아 있었다.
마마는 그에게 새 술을 권하지 않았다. 오래된 단골에게는 권하지 않는 것도 서비스였다.
“딸이 글을 쓴다며?”
“네.”
“무섭겠네.”
타카하시는 웃었다.
“들켰습니까?”
“아버지 얼굴이 다 그래. 딸이 뭘 물어볼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딸한테 거짓말하게 될까 봐 무서운 얼굴.”
타카하시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마는 잔을 닦으며 말했다.
“말 안 하는 것도 거짓말이 되는 날이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만 있는 게 더 괴롭지.”
타카하시는 고개를 숙였다. 회사에서는 모르는 척할 수 있었다. 문서가 다 오지 않았다, 확인이 더 필요하다, 공개 범위를 정해야 한다. 그런 말들은 필요했고,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달랐다.
유이가 묻는다면, 그는 회사의 입장이 아니라 아버지의 얼굴로 대답해야 했다. 그게 제일 어려웠다.
“다음 주말에 시간을 내 보려고 합니다.”
“딸하고?”
“네. 인터뷰라기보다... 제가 기억하는 걸 말하는 시간이 되겠죠.”
“잘됐네.”
“잘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마마는 그제야 웃었다.
“잘되려고 하지 말고, 도망만 안 가면 돼요.”
타카하시는 잔에 남은 술을 비웠다. 그리고 지갑을 꺼냈다.
“오늘은 이만.”
마마는 계산서를 접어 건넸다. 그리고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갈 때,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무리하지 말아요.”
타카하시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멈췄다.
“무리하지 않는 법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그럼 다시 배우면 되지. 연하게 마시는 법부터 배웠잖아.”
그 말에 타카하시는 처음으로 조금 편하게 웃었다.
문이 닫히고, 종소리가 작게 흔들렸다.
아카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 켄타는 식탁에서 학교 안내문을 보고 있었다.
“다녀왔어.”
켄타가 고개를 들었다.
“술 냄새.”
“한 잔 마셨어.”
“연하게?”
아카리는 놀라서 웃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엄마는 무리하면 얼굴에 다 써 있어. 오늘은 조금 덜 써 있어.”
아카리는 코트를 걸며 말했다.
“무리 안 했어.”
켄타는 믿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게 있어도 묻지 않았다. 아카리는 그게 또 미안해서,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켄타.”
“네?”
“어른이 가끔 늦게 들어오는 건, 집이 싫어서가 아닐 때도 있어.”
켄타는 안내문 끝을 만지작거렸다.
“알아요.”
“알고 있었어?”
“응. 집에 가져오기 전에 밖에서 조금 식히고 오는 거잖아요.”
아카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켄타는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지만, 아카리에게는 오래된 위로처럼 들렸다.
타카하시가 집에 돌아왔을 때, 유이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원고 위에는 검은 줄이 그어진 복사본과 새로 쓴 문장들이 놓여 있었다.
“아빠, 늦었네.”
“조금.”
“술 마셨어?”
“조금.”
유이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원고를 손으로 덮었다.
“나, 다음 주에 아빠한테 인터뷰해도 돼?”
타카하시는 코트를 벗지 않은 채 잠시 서 있었다.
예전 같으면 그는 “나중에 하자”고 했을 것이다.
확인할 게 남았다고,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고, 회사 일과 개인 일을 나눠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 말들은 모두 맞았다. 하지만 맞는 말만으로는 딸에게 닿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래.”
유이가 그를 보았다.
“정말?”
“전부 대답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피하지는 않을게.”
유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돼.”
타카하시는 그제야 코트를 벗었다.
거실에는 오래된 난방기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바깥의 도쿄는 차갑고, 회사들은 아직 불을 켜고 있었고, 누군가는 술집에서 마음을 식힌 뒤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날 밤, 유이는 원고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기록은 회사에 남고, 대답은 사람에게서 온다.’
그 문장은 아직 완성된 결론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질문으로 가는 문장으로는 충분했다.
마마는 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 가게 불을 하나씩 낮췄다.
카운터 위에는 빈 잔 두 개와 물방울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다녀가고, 말은 남고, 술은 사라졌다.
마마는 오래된 장부가 든 서랍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거기에는 예전 손님들의 이름도, 병에 붙였던 상표도,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메모들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꺼내지 않았다.
술집에서 들은 말은 영수증이 아니었다.
그래도 누군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완전히 버려지지도 않았다.
간판의 雪(눈)이라는 글자가 골목에 희미하게 번졌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도쿄의 밤은 조금 하얗게 식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