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니혼고 프렌즈 홈

16화

타인의 시간

2026-08-25 · 읽는 시간 약 10분

16화, 타인의 시간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2

16화 대표 이미지

구립도서관의 반납기한표는 늘 작았다.

책 맨 뒤에 붙은 종이 한 장.
거기 찍힌 날짜 하나가 이상하게 사람을 성실하게 만들었다. 켄타는 직업 안내 책 두 권을 들고 대출대 앞에 섰다.

지난주에 빌린 책이었다.
‘자료 관리의 일’과 ‘컴퓨터가 바꾸는 사무직’.

다 읽지는 못했다. 읽다가 모르는 말이 많아 몇 번이나 앞장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반납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조금 더 가지고 있고 싶었다.

대출대의 사서가 책 뒤쪽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 반납일이네.”

켄타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もう少し借りてもいいですか。(조금 더 빌려도 될까요?)”

사서는 웃으며 대출카드를 확인했다.

“예약이 없으니까 괜찮아.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어.”

“연장하면 좀... 게으른 사람 같아 보일까요?”

사서는 도장을 들다가 켄타를 보았다.

“返すつもりがあるなら、延長できます。(돌려줄 생각이 있다면 연장할 수 있어요.)”

도장이 종이에 찍혔다.

새 날짜가 생겼다.
켄타는 그 날짜를 한참 보았다.

미루는 것과 연장하는 것은 비슷해 보였지만,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연장은 돌아올 날짜를 정하는 일이었다.

도서관 복도 끝 자판기 앞에서 켄타는 유이를 만났다.

유이는 대학 도서관이 아니라 이 작은 구립도서관에 와 있었다. 가방 안에는 원고 뭉치와 복사한 업계지 기사들이 삐죽 나와 있었다.

“여기서 보네요.”

켄타가 먼저 말했다.

유이는 조금 놀란 얼굴을 하다가 웃었다.

“나도 가끔 와. 여긴 회사 이름들을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볼 수 있어서.”

“회사 이름들이요?”

“응. 학교 도서관에 있으면 동양출판, 세이와, 졸업작품, 그런 게 너무 크게 보여. 여긴 동네 사람들이 신문 읽고, 애들이 그림책 보고, 할머니들이 잡지 보잖아. 그러면 내가 쓰는 이야기도 결국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거구나 싶어져.”

켄타는 그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충 좋은 말 같다고 생각했다.

유이가 켄타 손에 든 책을 보았다.

“연장했어?”

“네. 다 못 읽어서요.”

“좋네.”

“근데 연장하는 게 도망치는 건 아니겠죠?”

유이는 자판기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하나 뽑았다. 켄타에게는 코코아를 뽑아 건넸다.

“도망이면 날짜를 안 남기겠지.”

“날짜를 남기면요?”

“돌아올 생각이 있다는 뜻 아닐까.”

켄타는 코코아 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유이 씨도 연장 중이에요?”

유이는 잠시 웃었다.

“응. 사람들 말을 조금 더 빌리고 있는 중.”

“반납은 어떻게 해요?”

“그게 어렵더라. 책은 반납함이 있는데, 말은 반납함이 없어서.”

켄타는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쓴 다음에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유이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간단한 말이었다.
그래서 놓치고 있던 말이기도 했다.

“그러게. 빌린 말은 보여 주면서 돌려줘야겠네.”

켄타는 괜히 쑥스러워져 코코아를 마셨다.

도서관 창밖으로 오후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책장 사이로 먼지가 천천히 움직였다.
크고 복잡한 회사의 시간과 달리, 도서관의 시간은 조용히 사람을 기다려 주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오전, 동양출판 자료관리위원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회의실에는 타카하시 부장과 와타나베 이사, 자료관리 담당 과장, 총무부 직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마루산상사 사람은 없었다. 마루산상사는 동양출판의 위탁 자료를 입력하고 대조하는 외부 협력사였고, 이 회의는 동양출판 내부의 결정 자리였다.

타카하시는 회의 자료를 넘기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와타나베는 가방 안쪽에 얇은 봉투를 넣어 두고 있었다.

그 안에는 보고 초안이 있었다.

1971년 세이와 협의 경위에 관한 보고 초안.

아직 제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숨긴 것도 아니었다. 오늘 그는 그 문서를 회의 안건으로 올릴 생각이었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갑자기 꺼내 모두를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위원회는 먼저 공개 범위와 보존 범위를 확인했다.
30주년 기념 전시 자료 중 어떤 문장을 공개 목록에 넣을지, 어떤 자료를 내부 보존으로 돌릴지, 원본 열람 권한은 어디까지 둘지에 대한 건조한 논의가 이어졌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와타나베가 손을 들었다.

“다음 회의 안건으로 하나 추가하고 싶습니다.”

자료관리 과장이 수첩을 들었다.

“어떤 건입니까?”

“1971년 세이와 협의 경위 확인 건입니다. 공식 자료와 개인 보유 메모, 그리고 외부 위탁 대조 결과를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회의실 공기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타카하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손끝이 멈춘 것을 와타나베는 보았다.

자료관리 과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바로 검토할 사항입니까?”

와타나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관련 자료를 정리해서 다음 회의에 제출하겠습니다. 참석 범위도 다시 정해야 합니다.”

그는 날짜를 말했다.
다음 주 목요일 오전 10시.

과장은 수첩에 적었다.
회의록에도 남았다.

회의가 끝난 뒤, 타카하시와 와타나베는 복도에 나란히 서게 됐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복도에는 직원들이 서류를 들고 바쁘게 오갔다.

타카하시가 먼저 말했다.

“오늘 내실 줄 알았습니다.”

와타나베는 잠시 침묵했다.

“오늘 냈다면, 제가 제 마음을 덜기 위해 내는 문서가 되었을 겁니다.”

“また延ばすんですか。(또 미루는 겁니까?)”

와타나베는 피하지 않았다.

“先延ばしにはしません。(미루지는 않겠습니다.)”

“그 차이를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날짜를 남겼습니다. 안건으로도 올렸습니다. 제 서랍 안에만 있던 문서가 이제 회의록으로 옮겨갔습니다.”

타카하시는 아무 말 없이 와타나베를 보았다.

“믿어 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와타나베가 말했다.

“다만 이번엔, 제가 숨는 방식으로 시간을 쓰지 않겠습니다.”

타카하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겠다고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날짜는 지켜보겠습니다.”

그 말은 차가웠지만, 문을 닫는 말은 아니었다.
와타나베는 그 정도의 대답도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날 오후, 마루산상사 IT추진실에서는 동양출판에서 온 일정 변경 팩스가 공유됐다.

아카리는 팩스를 읽고, 진행표의 해당 항목을 수정했다.

‘공개 반영 보류 연장.’
‘동양출판 내부 회의 후 재지시 예정.’
‘마루산상사 IT추진실 - 원자료 및 입력본 현 상태 유지.’

미사키가 옆에서 화면을 보며 말했다.

“또 보류네요.”

“응.”

“보류라는 말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서 좀 답답해요.”

아카리는 커서를 비고란에 두었다.

“보류도 이유와 날짜가 있으면 업무야.”

“이유와 날짜요?”

“응. 이유 없이 멈추면 방치고, 이유와 다음 확인일이 있으면 보류.”

미사키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理由があるなら、待てます。(이유가 있으면 기다릴 수 있어요.)”

아카리는 그녀를 보고 웃었다.

“맞아. 기다리는 쪽도 그래야 덜 불안해.”

“그럼 동양출판 쪽에서 다음 주 목요일까지 기다리라는 거네요.”

“그렇지. 우리는 마루산상사 사람이니까, 동양출판의 결정을 대신할 수는 없어. 대신 기다리는 동안 자료가 흐트러지지 않게 지키는 거야.”

미사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속이 다르니까 책임도 다르게 남기는 거죠?”

아카리는 조금 놀라 미사키를 보았다.

“이제 제법인데?”

“주임님이 맨날 말하잖아요.”

“내가 그렇게 맨날 말해?”

“네. 거의 반납 안내 방송처럼요.”

아카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날 오후의 마루산상사 IT추진실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프린터도 덜 울렸고, 전화도 적었다.
하지만 조용하다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파일명을 고치고, 보존 위치를 확인하고, 다음 사람이 헤매지 않게 작은 표시를 남겨야 했다.

아카리는 비고란에 마지막 문장을 입력했다.

‘다음 확인일: 동양출판 자료관리위원회 종료 후.’

날짜가 있는 기다림은, 적어도 빈칸은 아니었다.

유이는 대학 식당 구석자리에서 원고를 펼쳐 놓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켄타가 한 말이 계속 떠올랐다.

쓴 다음에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은 어린아이의 단순한 조언처럼 들렸지만, 사실 유이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던 절차였다. 취재한 말을 원고에 쓰기 전,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 돌아갈지 정하는 일. 그것은 허락을 받는 일이기도 했고, 빌린 말을 돌려주는 일이기도 했다.

유이는 새 종이를 꺼내 목록을 만들었다.

타카하시 류지 - 가족 인터뷰 인용 확인.
와타나베 히로시 - 실명 발언 인용 확인.
오오츠카 - 회사 설명 및 공개 범위 확인.
혼마 - 개인 의견 표기 확인.

마지막 줄에서 펜이 멈췄다.

나카무라 아카리.

아카리는 취재 대상이라기보다, 자료를 다루는 태도를 보여 준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을 원고에 넣을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넣는다면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넣지 않더라도, 그 태도는 유이의 문장 어딘가에 남을 것이다.

유이는 목록 위에 제목을 적었다.

‘빌린 말을 돌려주는 방법.’

그때 지도교수가 식판을 들고 지나가다 유이를 발견했다.

“식당에서도 과제를 하는구나”

“네. 연구실보다 여기가 조금 덜 무서워서요.”

교수는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건 좋은 이유야. 무서운 글은 가끔 사람 많은 곳에서 써야 덜 혼자만의 판결문이 되거든.”

유이는 목록을 교수에게 보여 주었다.

“인용하기 전에 확인하려고요.”

교수는 천천히 읽었다.

“좋아. 다만 확인을 받는 것과 허락을 떠넘기는 건 달라.”

“무슨 뜻이에요?”

“네가 쓴 글의 책임은 결국 네가 져야 해. 상대가 ‘괜찮다’고 했다고 해서, 네 문장이 전부 괜찮아지는 건 아니야.”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보여 주는 건 필요해. 빌린 말이 어디로 갔는지 상대가 모르는 것보다는 낫지.”

유이는 켄타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반납함은 없지만, 분명 돌려줄 수는 있었다.

그날 저녁, 와타나베는 집 식탁에 보고 초안을 올려놓았다.

아내는 저녁상을 치우다 말고 그 종이를 보았다.
예전 같으면 와타나베는 서류를 가방 안에 넣었을 것이다. 집에 회사 일을 들여놓지 않는다는 오래된 규칙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규칙이 자신을 편하게 하는 문이었는지, 가족을 보호하는 벽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내가 물었다.

“出さないんですか。(제출 안해요?)”

와타나베는 고개를 들었다.

“다음 회의 안건으로 올렸소. 그때 제출할 생각이오.”

“오늘은 왜 안 냈어요?”

“내가 너무 급하게 내면, 또 내 마음을 정리하려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이 될 것 같았소.”

아내는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럼 날짜는 정했어요?”

“다음 주 목요일.”

“달력에 써요.”

와타나베는 잠시 아내를 보았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오?”

“당신은 날짜가 없으면 잘 숨잖아요.”

그 말은 부드럽지 않았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거실 벽 달력 앞으로 가서 다음 주 목요일 칸에 작은 글씨로 적었다.

자료관리위원회. 보고 초안 제출.

아내는 그 글씨를 확인하듯 바라보았다.

“이제 집에서도 알게 됐네요.”

와타나베는 펜을 내려놓았다.

“미안하오.”

아내는 바로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식탁 위 그릇을 하나씩 치웠다.
괜찮다는 말은 아직 너무 일렀다. 하지만 그가 서류를 숨기지 않은 것만큼은 그녀도 보았다.

현관 쪽에서 전화벨이 한 번 울렸다가 끊겼다.
와타나베는 자동응답기에 남은 짧은 소리를 들었다.

세이와의 쿠로다였다.
“한 번 더 이야기합시다.”

와타나베는 메시지를 지우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로 전화하지도 않았다.

대신 보고 초안 옆에 메모지를 하나 붙였다.

쿠로다 연락.
다만 제출 일정은 유지.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단번에 할 수 있는 사람처럼 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밤이 깊어질 무렵, 켄타는 연장한 책을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반납기한표에는 새 날짜가 찍혀 있었다.
그 작은 카드 안의 날짜가 이상하게 든든했다.

아카리는 빨래를 개다가 책을 힐끗 보았다.

“연장했어?”

“응.”

“다 읽을 수 있겠어?”

“모르겠어. 그래도 이번엔 어디까지 읽었는지 표시해 두려고.”

아카리는 웃었다.

“그것도 기록이네.”

켄타는 책갈피를 끼우며 말했다.

“미루는 거랑 연장하는 거랑 좀 다른 것 같아.”

“어떻게?”

“미루는 건 그냥 안 보는 거고, 연장은 다시 볼 날짜를 정하는 거.”

아카리는 손에 든 수건을 접다 말고 켄타를 보았다.

“좋은 말이네.”

“도서관에서 배웠어.”

“사서님한테?”

“조금은. 유이 씨한테도.”

아카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켄타가 묻지도 않았는데 덧붙였다.

“유이 씨 원고도 연장 중인 것 같아. 근데 도망치는 건 아닌 것 같았어.”

아카리는 조용히 웃었다.

“그 사람도 날짜를 찾고 있겠지.”

켄타는 책 위에 손을 올렸다.

어른들은 자꾸 복잡한 일을 했다.
하지만 가끔은 도서관에서 배운 작은 규칙 하나가 어른들의 일을 조금 이해하게 해 주었다.

빌렸으면 돌려준다.
늦어지면 연장한다.
연장하려면 날짜를 남긴다.

아주 간단한 규칙인데, 사람들은 너무 자주 잊는 것 같았다.

같은 밤, 유이는 책상 앞에서 원고 첫 장을 다시 열었다.

그녀는 사건의 결론을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엇을 잃었는지도, 와타나베가 무엇을 숨겼는지도 바로 쓰지 않았다.

대신 오늘 만든 목록을 원고 옆에 붙였다.

‘인용 확인 필요.’
‘표현 조정 필요.’
‘감정이 식은 뒤 재검토.’

유이는 새 문장을 썼다.

‘사람의 말을 빌린 글에는 반납함이 없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만든 길로 그 말을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

그 사이, 도쿄의 여러 곳에서 날짜들이 생겼다.

켄타의 책 뒤에는 새 반납기한이 찍혔다.
아카리의 진행표에는 다음 확인일이 입력됐다.
동양출판 회의록에는 다음 안건이 남았다.
와타나베의 집 달력에는 보고 초안 제출일이 적혔다.
유이의 원고 옆에는 인용 확인 목록이 붙었다.

누군가는 아직 용서하지 않았고,
누군가는 아직 고백을 끝내지 못했고,
누군가는 아직 글을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루는 대신 날짜를 남겼다.

그리고 어떤 삶은,
거창한 결심보다 그렇게 작게 찍힌 다음 날짜 하나로 겨우 앞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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