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니혼고 프렌즈 홈

17화

빨간 색연필

2026-08-25 · 읽는 시간 약 12분

17화, 빨간 색연필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2

17화 대표 이미지

복사기는 꼭 급할 때 종이를 물었다.

유이는 대학 앞 작은 복사점에서 기계 덮개를 열고 멈춰 섰다. 안쪽에 걸린 종이는 반쯤 구겨진 채였다. 주인아저씨가 카운터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무리하게 잡아당기면 더 찢어져.”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많이 한꺼번에 넣었나 봐요.”

아저씨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그리고 유이가 들고 온 원고 뭉치를 보았다.

“졸업 논문?”

“비슷한 거예요. 졸업작품 원고요.”

“그럼 더 천천히 해야지.”

그는 원고를 한 장씩 가지런히 맞춰 주며 말했다.

“急がなくていいから、一枚ずつね。(서두르지 말고 한 장씩.)”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고는 총 네 묶음이었다.
아버지에게 보여 줄 부분.
와타나베에게 확인받을 부분.
아카리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할 부분.
그리고 지도교수에게 제출할 중간본.

같은 원고였지만, 모두 같은 원고는 아니었다.
누구에게 어떤 문장을 보여 줄지 정하는 일은, 글을 쓰는 일만큼 어렵다.

유이는 각 묶음 첫 장에 손으로 적었다.

읽어봐 주세요.
고칠 곳이 있으면 표시해 주세요.
다만 제가 써야 할 책임까지 넘기지는 않겠습니다.

그 문장을 쓰고 나니 조금 부끄러웠다. 너무 정직해서 오히려 서툴러 보였다. 그래도 지우지 않았다. 지금 유이에게 필요한 건 매끄러운 문장보다, 흔들리는 책임을 숨기지 않는 문장이었다.

복사점 유리문 밖으로 학생들이 지나갔다. 취업 설명회 자료를 든 친구도 있었고, 테니스 라켓을 든 학생도 있었다. 모두 각자의 마감일에 맞춰 걷고 있는 모습이었다.

유이는 복사된 원고를 봉투에 넣었다.

종이는 아직 따뜻했다.

아버지에게 원고를 건넨 건 그날 저녁이었다.

유이는 식탁 위에 봉투를 올려놓았다. 타카하시는 바로 열지 않았다. 봉투를 보고, 유이를 보고, 다시 봉투를 보았다.

“이제 내가 읽을 차례구나.”

“응.”

유이는 괜히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読んでもらえますか。(읽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

타카하시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집에서까지 그렇게 정중하게 말하니 좀 무섭다.”

“나도 무서워.”

“무엇이?”

“아빠가 읽고 싫어할까 봐.”

타카하시는 봉투를 손끝으로 눌렀다.

“싫을 수도 있지.”

“그럼 고쳐야겠지?”

“고칠 수도 있고, 그대로 둘 수도 있겠지. 네 글이니까.”

유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이 제일 어려워.”

타카하시는 봉투를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문은 완전히 닫지 않았다. 좁게 열린 틈 사이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유이는 거실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시계 소리가 커졌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도 커졌다.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는 건 이상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누군가 자기 속을 천천히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뒤, 타카하시가 나왔다.

원고에는 빨간 색연필 표시가 몇 군데 들어 있었다.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무거워 보였다.

타카하시는 식탁에 앉았다.

“잘 썼다.”

유이는 안도하려다가, 그의 표정을 보고 멈췄다.

“근데?”

“잘 썼는데, 한 군데가 걸린다.”

그는 한 문장에 밑줄을 그은 부분을 펼쳤다.

‘타카하시는 젊은 시절 자신의 미래를 빼앗긴 채, 회사 안에 남겨진 사람이 되었다.’

유이는 조용히 그 문장을 보았다.

타카하시가 말했다.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야.”

“그럼 왜?”

그는 빨간 연필 끝으로 문장을 가볍게 두드렸다.

“その書き方だと、私は被害者だけになる。(그렇게 쓰면 나는 피해자만 돼.)”

유이는 숨을 멈췄다.

타카하시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상처받은 사람이 맞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야. 나도 야심이 있었고, 인정받고 싶었고, 회사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묻지 않은 시간도 있었고, 모른 척한 시간도 있었어.”

“아빠 잘못이라는 뜻이야?”

“아니. 잘못을 나눠 갖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사람을 한 가지 얼굴로만 쓰면, 그 사람은 다시 갇혀버리게 돼.”

유이는 원고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아버지를 지키려고 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키려는 마음도 가끔은 사람을 작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고치면 좋을까?”

타카하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건 네가 찾아야지.”

“힌트도 안 줘?”

“준다.”

그는 빨간 색연필로 문장 옆에 짧게 썼다.

‘잃은 사람. 그러나 잃은 뒤에도 살아온 사람.’

“이 정도.”

유이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잃은 뒤에도 살아온 사람.

그건 피해자보다 넓은 말이었다.
아버지를 덜 불쌍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더 온전하게 보는 말이었다.

다음 날 점심시간, 아카리는 마루산상사 근처 커피스탠드에서 유이를 만났다.

마루산상사 IT추진실에서 점심시간에 잠깐 나온 것이었다. 유이는 회사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일부러 근처에서 기다렸다. 회사 일과 개인적인 부탁을 섞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카리는 봉투를 받자마자 겉면을 확인했다.

“회사 주소로 안 보내줘서 고마워요.”

“그게 맞을 것 같았어요.”

“맞아요. 저는 마루산상사 직원이고, 동양출판 자료는 위탁 업무로 다루는 거니까요. 제 개인적인 말까지 회사 문서처럼 섞이면 곤란해져요.”

두 사람은 창가의 좁은 자리에 앉았다. 아카리는 원고 두 장을 빠르게 읽지 않았다. 한 줄 읽고 멈추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고,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유이는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아카리가 말했다.

“좋아요. 그런데 여기.”

그녀가 한 문장을 짚었다.

‘아카리는 기록을 지키는 사람으로, 사라진 이름을 되돌리는 일에 조용히 힘을 보탠다.’

아카리는 잠깐 웃었다.

“저를 너무 좋은 사람으로 쓰셨어요.”

유이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런 뜻은...”

“알아요.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저는 매일 그렇게 용감한 사람이 아니에요. 회사에서는 눈치도 보고, 괜히 말하면 일이 커질까 봐 입 다문 적도 많고, 집에서는 켄타한테 엄마니까 이해해 달라는 얼굴을 한 적도 많아요.”

아카리는 커피잔을 감쌌다.

“いい人みたいに書かないでください。(좋은 사람처럼만 쓰지 말아 주세요.)”

유이는 펜을 들었다.

“그럼 어떻게 쓰면 좋을까요?”

“저는 동양출판 사람이 아니에요. 마루산상사 IT추진실에서 위탁 자료를 처리하는 사람이고, 제 역할은 자료를 대신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료가 헷갈리지 않게 남도록 돕는 거예요.”

아카리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중에 누가 더 힘들어지는 걸 많이 봐서 그래요. 정리를 대충 하면 결국 다음 사람이 다 떠안거든요.”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익명으로 쓸까요?”

“가능하면요. ‘외부 전산화 담당자’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회사 이름을 쓰려면 업무 범위를 정확히 써 주세요. 제가 동양출판 내부 직원처럼 보이면 안 돼요.”

“네. 꼭 그렇게 할게요.”

아카리는 원고를 접어 돌려주었다.

“그리고 유이 씨.”

“네.”

“글 쓰는 사람이 누군가를 좋게 쓰고 싶어지는 마음, 이해해요. 그런데 좋은 사람으로만 쓰면 그 사람의 고단함도 사라져요.”

유이는 그 말을 노트에 적었다.

좋은 사람으로만 쓰면 고단함도 사라진다.

아카리는 시계를 보았다.

“들어가야겠네요. 그럼 원고, 잘 고쳐요. 너무 예쁘게 말고 정확하게.”

와타나베는 유이의 확인용 원고를 집에서 읽었다.

식탁 위였다.
아내는 맞은편에서 귤을 까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와타나베는 이런 종이를 집에서 펼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숨기지 않으려고 했다. 숨기지 않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종이를 넘기는 손이 조금 어색했다.

원고에는 자신이 한 말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제가 고치지 않았습니다.
사과한다면 본인에게 하겠습니다.
회사의 절차가 사람의 이름을 가렸습니다.

자기 말인데도 낯설었다.
입 밖으로 나왔을 때보다 종이에 있을 때 더 단단했다. 도망갈 틈이 없어 보였다.

와타나베는 낮게 중얼거렸다.

“読まれるのは、少し怖いですね。(읽히는 건 조금 무섭네요.)”

아내는 귤껍질을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당신이 무서우면, 그동안 읽히지 못한 사람들은 어땠겠어요.”

와타나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내는 원고를 보자고 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고칠 거 있어요?”

“몇 군데 표현이 너무 정확합니다.”

“정확하면 안 돼요?”

“아프니까요.”

“그럼 아픈 게 문제인지, 틀린 게 문제인지 먼저 봐야죠.”

와타나베는 원고 가장자리를 손으로 눌렀다.

틀렸다고 표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척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빨간 펜을 들었다.
고칠 문장에는 선을 긋지 않았다. 대신 첫 장 위에 짧게 썼다.

‘인용 가능. 다만 보고 초안 제출 전 공개 시점 협의 필요.’

회사 사람다운 문장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세이와의 쿠로다였다.

쿠로다는 도쿄역 야에스 출구 쪽 코인로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 하필 여기냐고 와타나베가 묻자, 쿠로다는 웃었다.

“카페는 사람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잖습니까. 여긴 다들 뭔가 맡기고 가거나 찾아가는 사람들이라, 오래 못 버팁니다.”

와타나베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역 안은 바빴다. 여행가방을 든 사람들, 서류가방을 든 회사원들, 길을 잃은 학생들. 안내 방송이 울리고, 전광판이 바뀌고, 사람들은 자기 열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쿠로다는 담배 대신 박하사탕을 입에 넣었다.

“정말 제출할 겁니까?”

“다음 주 목요일 안건으로 올렸습니다.”

“안건으로 올린 것과 제출하는 건 다르죠.”

“이번엔 다르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

쿠로다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그러면 세이와도 가만히 못 있습니다. 당시 기록을 다시 봐야 하고, 퇴직한 사람들 이름도 나올 겁니다. 내 이름도 어딘가에는 있겠죠.”

와타나베는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래서 가져왔습니다.”

쿠로다는 봉투를 보았다.

“뭡니까?”

“제 보고 초안 일부입니다. 당신이 등장하는 부분만 복사했습니다.”

“나는 읽고 싶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줍니까?”

와타나베는 봉투를 내밀었다.

“당신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쿠로다는 봉투를 받지 않았다.

“나는 당신처럼 갑자기 도덕적인 사람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저도 갑자기 도덕적인 사람이 된 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와타나베는 잠시 역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더는 모른 척하는 데 필요한 힘이 남지 않았습니다.”

쿠로다는 피식 웃었다.

“그게 늙었다는 뜻입니다.”

“그럴지도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 타카하시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지만, 세이와에는 세이와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동양출판도 이익을 얻었고요. 다들 손해 본 척만 할 수는 없어요.”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한 사람의 이름을 그렇게 중요하게 만드는 겁니까?”

와타나베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 한 사람의 이름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쿠로다는 입을 다물었다.

와타나베는 다시 봉투를 내밀었다.

“읽어 달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읽지 않은 채로 반박하지는 마십시오.”

한참 뒤, 쿠로다는 봉투를 받았다.

“당신, 예전보다 말이 거침없어졌습니다.”

“예전보다 조금 덜 숨기려 합니다.”

쿠로다는 봉투를 코트 안쪽에 넣었다.

“읽는다고 약속한 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걸 세이와 법무에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겁 안 납니까?”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않았다.

겁은 났다.
하지만 이제 겁난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켄타는 학교에서 돌려받은 작문 용지를 들고 구립도서관에 갔다.

국어 선생님은 빨간 펜으로 여러 군데 표시를 해 두었다. 틀린 맞춤법도 있었고, 문장이 길다는 표시도 있었다. 그런데 발표 때 읽지 않았던 부분에는 이런 코멘트가 적혀 있었다.

‘읽지 않은 부분도 네 글의 일부다. 나중에 네가 읽을 수 있을 때 다시 읽어 보렴.’

켄타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도서관 창가 자리에는 유이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원고 몇 장을 펼쳐 놓고 있었다.

“오늘도 여기네요.”

켄타가 말했다.

유이는 고개를 들었다.

“너도 오늘도 여기네.”

“책 연장한 거 읽으려고요.”

“좋다.”

켄타는 유이 앞의 원고를 힐끗 보았다.

“고치는 중이에요?”

“응. 사람들이 읽고 빨간 색연필로 표시해서 돌려줬어.”

“많이 틀렸어요?”

유이는 잠깐 생각했다.

“틀렸다기보다는... 작게 축소해서 쓴 부분이 있었어.”

“작게요?”

“응. 사람을 피해자만으로 쓰거나, 좋은 사람만으로 쓰거나, 나쁜 사람만으로 쓰는 거.”

켄타는 자기 작문 용지를 떠올렸다.
엄마를 너무 강한 사람처럼 썼던 문장. 선생님이 빨간 줄을 긋지는 않았지만, 켄타 자신이 다시 읽으며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던 문장.

“그럼 어떻게 써요?”

유이는 웃었다.

“나도 배우는 중.”

켄타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悪い人だけにすると、簡単すぎます。(나쁜 사람만으로 만들면 너무 쉬워요.)”

유이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말, 어디서 배웠어?”

“그냥요. 요즘 다들 그런 얘기 하니까.”

유이는 원고 여백에 그 말을 적었다.

“써도 돼?”

“제가 한 말로요?”

“응. 이름은 안 쓰고.”

켄타는 조금 쑥스러워했다.

“그럼 괜찮아요. 근데 너무 똑똑한 척하게 쓰지는 마세요.”

유이는 웃었다.

“알았어. 너도 좋은 사람처럼만 안 쓸게.”

“저는 좋은 사람 아닌데요.”

“그럼 더 쉽겠네.”

둘은 조용히 웃었다.

도서관 안에서는 책 넘기는 소리와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각자의 문장을 읽고 있었다. 누구는 시험공부를 하고, 누구는 신문을 읽고, 누구는 여행 안내서를 펼쳤다.

켄타는 자기 작문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엄마에 대해 쓴 문장 하나 옆에 작게 적었다.

‘엄마는 강한 사람이다’ → ‘강한 척해야 했던 사람이다.’

고친 문장이 더 마음에 들었다.
엄마가 조금 덜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유이는 그날 밤, 책상 위에 돌아온 원고들을 나란히 펼쳤다.

아버지의 빨간 색연필.
아카리의 짧은 메모.
와타나베의 딱딱한 확인 문장.

사람들은 고쳐 달라고 원고를 돌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어디에 어떻게 놓였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너무 작게 쓰이지 않았는지, 너무 쉽게 판단되지 않았는지, 자신의 말이 남의 결론을 위해 끌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유이는 새 문장을 썼다.

‘확인용 원고는 허락을 받기 위한 종이가 아니라, 빌린 말이 어디에 놓였는지 함께 보는 자리 역할이다.’

그리고 조금 더 썼다.

‘나는 사람들을 단순하게 쓰고 싶었다. 그래야 문장이 빨리 앞으로 나아가니까. 하지만 사람은 문장의 속도에 맞춰 단순해지지 않는다.’

그 문장을 쓰고 나니, 조금 숨이 트였다.

방문 밖에서는 타카하시가 조용히 찻물을 끓이고 있었다.
언젠가 이 원고가 완성되면, 아버지는 다시 읽을 것이다. 와타나베도 읽을 것이다. 아카리도 어쩌면 일부를 읽을 것이다. 켄타는 자기 말이 어디에 숨었는지 모른 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유이는 계속 고쳐야 했다.

빨간 색연필은 틀렸다는 표시만이 아니었다.
여기서 나를 다시 봐 달라는 표시이기도 했다.

와타나베는 집으로 돌아와 보고 초안을 다시 펼쳤다.

쿠로다에게 넘긴 복사본이 머릿속에서 계속 걸렸다. 그가 세이와 법무에 넘길 수도 있었다. 퇴직한 임원들에게 연락할 수도 있었다. 와타나베를 말리기 위해 더 큰 벽을 세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봉투를 건넨 뒤 마음이 조금 조용해졌다.

모든 걸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그는 달력의 다음 주 목요일을 보았다.
자료관리위원회. 보고 초안 제출.

글씨는 여전히 작았다.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와타나베는 펜을 들어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타카하시에게 사전 공유 완료.
쿠로다에게 관련 부분 확인 요청.

처음으로, 자기 혼자만 아는 일정이 아니었다.

그는 불을 끄기 전 식탁을 보았다. 아내가 귤껍질을 치워 놓은 접시가 비어 있었다. 집은 조용했다. 하지만 오늘의 조용함은 예전의 침묵과 조금 달랐다.

무언가를 숨긴 뒤의 조용함이 아니라,
무언가가 읽히기 시작한 뒤의 조용함이었다.

도쿄의 밤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몇 장의 원고 위에는 빨간 색연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자국들은 문장을 멈추게 했지만, 이야기를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
사람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