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니혼고 프렌즈 홈

18화

읽었다는 말

2026-08-25 · 읽는 시간 약 13분

18화, 읽었다는 말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2

18화 대표 이미지

쿠로다는 도쿄역 야에스 쪽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출근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역은 여전히 붐볐다. 여행가방을 끄는 사람, 서류가방을 품에 안은 사람,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빠르게 걷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 목적지를 알고 있는 얼굴로 지나갔다.

쿠로다 앞에는 갈색 봉투가 놓여 있었다.

와타나베가 건넨 보고 초안 일부.
세이와미디어그룹 담당자였던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만 복사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회사에서 읽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도 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역까지 가지고 나왔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혼자가 되는 장소. 누구도 남의 서류를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 곳.

쿠로다는 봉투를 열었다.

첫 장에는 와타나베의 딱딱한 문장이 있었다.

1971년 세이와 협의 경위에 관한 보고 초안.

그 아래로 동양출판, 세이와, 신매체 기획안, 아동·교육서 유통망, 학교·도서관 납품 루트 같은 말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몇 줄 뒤, 자기 이름이 나왔다.

쿠로다.

종이에 적힌 자기 이름은 낯설었다.
그 시절에는 너무 자주 불렸던 이름인데, 스무 해가 지나 종이 위에서 보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세이와 측 담당자 쿠로다는 해당 기획안의 문장과 방향성에 주목했으며, 초안 작성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기억함.’

쿠로다는 손가락으로 그 문장을 가만히 눌렀다.

기억났다.

1971년의 세이와 회의실. 넓은 창문. 담배 연기. 회색 양복을 입은 젊은 와타나베. 그리고 봉투에서 나온 기획안.

이야기는 책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문장을 처음 봤을 때, 쿠로다는 웃었다.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바로 물었다.

이걸 쓴 사람은 누구냐고.

그때 와타나베의 얼굴이 아주 조금 굳었다. 쿠로다는 그 표정을 보았다. 보았지만 모른 척했다. 사람은 가끔 남의 약한 곳을 정확히 보고도, 자기에게 유리하면 못 본 척한다.

그것도 죄였을까.

쿠로다는 보고 초안을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열차 안내 방송이 울렸다. 사람들은 움직였다.
그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유이는 대학 취업지원실에서 모의면접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에는 기업 설명회 일정표가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작년 선배들이 말하던 화려한 취업 시장은 이제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회사들은 여전히 “도전하는 인재”를 찾는다고 했지만, 모집 인원은 줄었고, 면접 질문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유이 앞에 앉은 동기는 자기소개를 매끄럽게 했다.

“저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유이는 그 말을 들으며 손바닥에 땀이 나는 걸 느꼈다.
자기 차례가 되자, 면접관 역할을 맡은 취업지원실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타카하시 씨, 1분 정도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유이는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

자기소개.
자기를 소개한다는 건 뭘까.
동양출판 부장의 딸. 졸업작품을 쓰는 학생. 세이와와 동양출판의 오래된 자료를 뒤지는 사람. 아버지의 상처에 화가 난 사람. 취업은 해야 하지만, 회사라는 말이 점점 무서워지는 사람.

그 모든 것을 1분 안에 줄이면, 무엇이 남을까.

유이는 천천히 말했다.

“少し考えてもいいですか。(잠깐 생각해도 될까요?)”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유이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말했다.

“저는 출판과 기록, 그리고 회사 안에서 사람의 이름이 어떻게 남거나 사라지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졸업작품을 쓰고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다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 관심이 회사에서 어떤 장점이 되는지, 어떤 능력으로 포장될 수 있는지, 유이는 쉽게 말하지 못했다.

“うまく言えません。(말이 잘 안 나와요.)”

그 말이 먼저 나와 버렸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유이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직원은 펜을 내려놓고 말했다.

“괜찮아요. 면접에서 늘 완벽하게 말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멈췄을 때, 왜 멈췄는지 본인이 알고 있으면 좋아요.”

모의면접이 끝난 뒤, 직원은 유이를 복도까지 불렀다.

“타카하시 씨는 정리되지 않은 말을 억지로 정리하려다 막히는 것 같아요.”

“그럼 면접에서는 불리하겠죠.”

“조금은요. 회사는 짧은 답을 좋아하니까.”

유이는 작게 웃었다.

“그럼 제가 회사랑 안 맞는 걸까요?”

직원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해 줄 수 있어요.”

그는 유이의 면접 메모지 위에 짧게 적었다.

무리하게 결론 내리지 말 것.

그리고 덧붙였다.

“無理にまとめなくていいよ。(억지로 정리하지 않아도 돼.)”

유이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면접에서 그래도 돼요?”

“면접에서는 짧게 말해야 할 때도 있죠. 하지만 글은 달라요. 특히 지금 쓰는 글은요. 빨리 정리하려고 사람을 줄이면, 나중에 본인이 그 문장을 못 견딜 수도 있어요.”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취업지원실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차가웠다.
친구들이 기업 안내 책자를 들고 지나갔다. 모두 미래를 향해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누구도 미래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있었다.

유이는 가방 안의 원고를 만졌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억지로 정리하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켄타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자전거 보관소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교실로 돌아가기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 늦게 들어가고 싶었다. 학교 복도는 가끔 너무 환했다. 밝은 곳에서는 숨기고 싶은 표정이 더 잘 보였다.

뒤에서 같은 반 스도라는 애가 불렀다.

“나카무라.”

켄타가 돌아보았다.

스도는 멋쩍은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며칠 전, 그는 켄타에게 “너희 엄마는 왜 맨날 혼자 오냐”고 물었던 아이였다. 그때 켄타는 웃고 넘겼다. 집에 와서야 그 웃음이 마음에 걸렸다.

스도가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좀 이상하게 말했지?”

켄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스도는 괜히 자전거 바퀴를 발끝으로 툭 찼다.

“그냥 물어본 건데, 애들이 웃어서.”

“너도 웃었잖아.”

켄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스도가 입을 다물었다.

켄타는 손에 든 체육복 주머니 가방을 조금 세게 쥐었다.
아카리가 코인세탁소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대로 화내는 편이 좋아.

화낸다는 건 소리치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켄타가 하고 싶은 건 소리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선을 긋고 싶었다.

“そういう言い方はやめて。(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스도는 켄타를 보았다.

“어?”

“우리 엄마 얘기 그렇게 하지 마.”

말하고 나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켄타는 싸움이 날까 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스도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켄타는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까지 확인할 힘은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면 됐다.

“알았어.”

켄타는 교실 쪽으로 걸어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교실 문 앞에서 그는 잠시 멈춰 섰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무서웠다. 그래도 웃고 넘겼을 때보다 덜 부끄러웠다.

그날 켄타는 노트 한구석에 작게 적었다.

화내는 건 크게 말하는 게 아니라, 여기부터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일 때도 있다.

마루산상사 IT추진실에서는 오후 내내 전화가 많았다.

동양출판에서 맡긴 30주년 자료 전산화 작업이 보류 상태로 들어가면서, 확인 전화와 일정 조정 전화가 이어졌다. 아카리는 자기 자리에서 진행표를 보며 전화를 받고 있었고, 미사키는 옆자리에서 파일명을 정리하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동양출판...”

말하다가 미사키의 얼굴이 굳었다.

아카리는 고개만 살짝 들었다.

미사키가 곧바로 고쳐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마루산상사 IT추진실입니다. 동양출판 자료 전산화 담당자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넘긴 뒤, 미사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방금 큰일 날 뻔했어요.”

아카리는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잘 고쳤어.”

“처음부터 틀렸잖아요.”

“중간에 고치는 것도 능력이야.”

미사키는 한숨을 쉬었다.

“계속 동양출판 자료만 보다 보니까, 진짜 제가 거기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럴 때일수록 첫 문장을 정확히 말해야 해.”

“마루산상사 IT추진실입니다.”

“응. 그리고 필요하면 이렇게 말하면 돼. ‘동양출판 자료 전산화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그럼 소속과 역할이 같이 남아.”

미사키는 메모지에 그대로 적었다.

마루산상사 IT추진실입니다.
동양출판 자료 전산화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그녀는 글씨를 쓰다 말고 웃었다.

“주임님, 이거 꼭 전화 응대 교육 같아요.”

“교육 맞아.”

“월급 더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은 총무에 해.”

두 사람은 작게 웃었다.

잠시 뒤, 미사키가 물었다.

“주임님은 안 헷갈려요?”

“헷갈려.”

“근데 왜 그렇게 안 헷갈리는 사람처럼 말해요?”

아카리는 화면의 진행표를 바라보았다.

“내가 헷갈리면, 네가 더 헷갈릴까 봐.”

미사키는 조용해졌다.

아카리는 곧바로 덧붙였다.

“근데 요즘은 나도 배워. 헷갈리면 헷갈린다고 표시해 두는 게 낫다는 걸.”

그녀는 진행표의 비고란에 한 줄을 추가했다.

‘업무 범위 및 소속 표기 재확인 필요.’

작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이런 문장이 나중에 사람을 덜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저녁 무렵, 유이는 구립도서관 앞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
날씨 예보에서는 흐림이라고만 했는데, 퇴근 시간에 맞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쿄의 겨울비는 눈보다 더 차가웠다. 옷깃 사이로 들어오면 몸보다 먼저 마음이 식었다.

도서관 문이 열리고 켄타가 나왔다.

손에는 연장한 책이 들려 있었다. 작은 접이식 우산도 있었다.

“유이 씨?”

“켄타.”

“우산 없어요?”

“응. 오늘 예보를 너무 믿었어.”

켄타는 자기 우산을 펼치려다 멈췄다.

“역까지 같이 가요. 저도 그쪽이에요.”

“너 집 반대쪽 아니야?”

켄타는 잠깐 눈을 피했다.

“조금 돌아가면 돼요.”

유이는 웃었다.

“그럼 미안해서 못 쓰지.”

켄타는 우산을 펼쳤다. 둘이 들어가기엔 조금 작았다.

“저 오늘 제대로 화냈어요.”

유이는 우산 아래로 들어오며 물었다.

“싸웠어?”

“아니요. 그냥 하지 말라고 했어요.”

“누구한테?”

“엄마 얘기 이상하게 한 애한테요.”

유이는 걸음을 늦췄다.

“무서웠겠다.”

“조금요.”

“그래도 잘했어.”

켄타는 고개를 숙였다. 우산 끝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말하고 났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큰일이 생기지는 않네요나니까 생각보다 별일 안 났어요.”

“가끔 그래. 말하기 전엔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데, 말하고 나면 그냥 비 오는 길이야.”

켄타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비 오는 길.

무너진 세상은 아니고, 그냥 젖은 길.
조심해서 걸으면 지나갈 수 있는 길.

역 앞 횡단보도에서 두 사람은 멈췄다. 유이는 가방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우산 손잡이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유이 씨 원고는요?”

“오늘은 억지로 정리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어.”

“그거 좋은 말이네요.”

“좋지. 어려워서 그렇지.”

“다들 어려운 말만 하네요.”

“그러게. 쉬운 말은 금방 끝나니까.”

신호가 바뀌었다.

둘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길을 건넜다.
우산은 작았고, 둘의 어깨는 조금씩 젖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역 입구에서 유이는 우산 밖으로 나왔다.

“고마워.”

“조심히 가세요.”

“너도. 그리고 오늘 한 말, 잊지 마.”

켄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이가 계단을 내려가고 나서야 켄타는 다시 우산을 접었다.
조금 돌아왔지만, 괜찮았다.
어쩌면 돌아가는 길에도 필요한 말이 남을 때가 있었다.

그날 밤, 와타나베의 집 전화가 울렸다.

아내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와타나베가 수화기를 들었다.

“와타나베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쿠로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読ませてもらいました。(읽었습니다.)”

와타나베는 의자에 앉았다.

“그렇습니까.”

“역에서 읽었습니다. 회사에서 읽기엔 좀 그렇더군요.”

“저도 그래서 일부만 드렸습니다.”

쿠로다는 잠깐 웃었다.

“배려입니까, 아니면 계산입니까?”

“둘 다일 겁니다.”

“솔직해졌군요.”

“뒤늦게요.”

수화기 너머에서 담배를 찾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쿠로다는 담배를 끊었다고 했지만, 숨소리만으로도 그가 손가락을 허전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이름을 빼 달라고 전화한 건 아닙니다.”

와타나베는 말없이 들었다.

“빼 달라고 할 자격은 없겠죠. 그 자리에는 나도 있었으니까.”

“네.”

“다만 한 가지는 추가해야 합니다. 세이와도 그 거래에서 분명히 이익을 봤습니다. 동양출판만 얻은 것처럼 쓰면 안 됩니다.”

“그 부분은 보완하겠습니다.”

“그리고...”

쿠로다는 말을 멈췄다.

와타나베는 재촉하지 않았다.

“당신이 그때 불편해하는 걸 알았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타카하시 이름이 나왔을 때요. 내가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을 때.”

와타나베는 눈을 감았다.

“알고 계셨군요.”

“봤습니다. 보고도 모른 척했습니다. 당신이 그 감정을 어떻게 쓰는지까지는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쿠로다는 낮게 말했다.

“그런데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모른 척한 사람도, 그 자리에 남습니다.”

와타나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쿠로다가 이어 말했다.

“내일 막으러 가지는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마워할 일 아닙니다. 협조한다고도 안 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세이와 내부 기록은 찾아보겠습니다.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 말은 뜻밖이었다.

와타나베는 수화기를 조금 더 세게 잡았다.

“찾아보겠다는 겁니까?”

“보고서가 나가면 어차피 누군가는 찾게 됩니다. 그럴 바엔 내가 먼저 보는 편이 낫겠죠.”

“그것도 계산입니까?”

이번에는 쿠로다가 웃었다.

“둘 다입니다.”

와타나베도 아주 작게 웃었다.

통화를 끊은 뒤, 그는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쿠로다는 용서받을 사람도, 용서해 줄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조금은 자기 자리에 서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내일은 어제와 달라질 수 있었다.

와타나베는 잠시 뒤 유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타카하시였다. 짧은 인사 뒤, 유이가 수화기를 받았다.

“와타나베입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내일 동양출판 자료관리위원회에서 보고 초안을 제출할 예정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유이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네.”

“그래서 부탁이 있습니다. 그 부분이 공식 절차에 올라가기 전까지, 원고의 해당 대목은 조금 더 기다려 줄 수 있습니까?”

유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와타나베는 그 침묵을 기다렸다.
이제는 기다리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는 걸 알았다.

잠시 뒤 유이가 말했다.

“待ちます。でも、忘れません。(기다리겠습니다. 하지만 잊지는 않겠습니다.)”

와타나베는 눈을 감았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저도 부탁이 있습니다.”

“말하세요.”

“내일 제출하신 뒤에, 아버지에게 먼저 알려 주세요. 제가 듣기 전에요.”

와타나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유이는 한동안 식탁 앞에 서 있었다.
타카하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유이가 먼저 말했다.

“내일 제출하신대.”

“그래.”

“나 기다리기로 했어.”

“잘했다.”

“근데 잊지는 않겠다고 했어.”

타카하시는 조용히 웃었다.

“그것도 잘했다.”

유이는 그제야 조금 숨을 쉬었다.

기다리는 것과 잊는 것은 달랐다.
그 차이를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와타나베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보고 초안은 갈색 봉투에 들어 있었다.
그 위에는 날짜와 안건명이 적혀 있었다.

1971년 세이와 협의 경위에 관한 보고 초안.
자료관리위원회 제출용.

그는 넥타이를 매다가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보았다.
이 얼굴로 얼마나 많은 회의를 지나왔을까.
얼마나 많은 결재를 했고, 얼마나 많은 말을 삼켰을까.

은퇴까지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조용히 지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무사히, 흠 없이, 가족에게 미안하지 않게. 하지만 흠 없이 끝나는 인생이 정말 좋은 인생인지는 이제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현관에서 구두를 신을 때, 아내가 나왔다.

“오늘이죠?”

“그렇소.”

아내는 봉투를 보았다.
그리고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평소처럼 말했다.

“行ってらっしゃい。(다녀와요.)”

그 평범한 말이 와타나베에게는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문을 열자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
역으로 가는 길에는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 어제와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와타나베의 가방 안에는 어제와 다른 종이가 들어 있었다.

동양출판 회의실에서는 곧 타카하시가 자료를 펼칠 것이다.
마루산상사 IT추진실에서는 아카리와 미사키가 다음 지시를 기다리며 파일을 지킬 것이다.
유이는 아직 원고를 열지 않은 채, 기다린다는 말을 자기 안에 붙들고 있을 것이다.
켄타는 어제 처음으로 말한 문장을 아마 오늘도 조금씩 떠올릴 것이다.
쿠로다는 세이와의 오래된 서고 앞에서, 열고 싶지 않은 상자를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모두가 같은 회의실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마주하고 있었다.

기다릴 것인가.
말할 것인가.
숨길 것인가.
읽힌 뒤에도 자기 말로 남을 것인가.

와타나베는 동양출판 건물 앞에서 잠시 멈췄다.

가방 속 봉투의 무게는 종이 몇 장보다 무거웠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는 그 무게를 남에게 몰래 넘기지 않기로 했다.

자동문이 열렸다.

와타나베는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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