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아버지라는 이름
5화, 아버지라는 이름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3

토요일 아침, 식탁 위에는 아직 제출하지 않은 가족 연락표가 놓여 있었다.
어젯밤 켄타가 접어두었던 종이였다. 접힌 자국 때문에 ‘부’라고 적힌 칸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아카리는 그 종이를 펴지 않았다. 대신 된장국 냄비의 불을 약하게 줄이고, 밥주걱을 물에 담갔다.
켄타는 평소보다 늦게 방에서 나왔다.
교복은 아니었다. 낡은 트레이닝복 바지에 회색 후드티. 머리도 제대로 빗겨지지 않은 채였다. 그는 식탁 앞에 앉아 가족 연락표를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피했다.
아카리는 밥을 퍼주며 말했다.
“오늘 그 사람을 만나고 올게.”
켄타는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그 사람 이름이 뭐라고 했지?”
“사토 켄지.”
켄타는 입속으로 아주 작게 되풀이했다.
“사토... 켄지.”
그 이름은 아직 아무 감정도 붙지 않은 낯선 단어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자기 몸 안쪽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말 같기도 했다. 그게 기분 나빴다.
“엄마 혼자 가?”
“응. 혼자 갈 거야.”
“위험한 사람은 아니야?”
아카리는 잠시 멈췄다.
위험한 사람.
그 말은 너무 단순했고, 또 너무 정확했다.
사토는 주먹을 휘두르거나 협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카리의 기억 속 사토는 다정하게 말하고, 좋은 문장을 골라주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웃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위험했다.
“꼭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널 바로 만나게 하지는 않을 거야.”
켄타는 고개를 숙였다.
아카리는 조금 더 가까이 앉았다.
“만날지 말지는 네가 정해도 돼.”
켄타는 그 말을 듣고도 바로 안심하지 않았다.
“내가 안 만나겠다고 하면?”
“그럼 만나지 않으면 돼.”
“그래도 엄마는 만나?”
“오늘은. 네가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말하러 가는 거니까.”
켄타는 그제야 숟가락을 들었다. 된장국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고는, 너무 뜨거운지 조금 얼굴을 찡그렸다.
아카리는 그 얼굴을 보다가 문득 아주 오래전 갓 태어난 켄타가 분유를 너무 뜨겁게 타면 울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도 자신은 서툴렀고, 지금도 서툴렀다. 다만 그때는 아이가 왜 우는지 몰라서 무서웠고, 지금은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을 조금 알 것 같아서 무서웠다.
켄타가 조용히 물었다.
“그 사람, 나 닮았어?”
아카리는 대답하기 전에 물컵을 잡았다.
“아직 모르겠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제 골목에서 본 사토의 얼굴은 너무 낯설어서, 닮은 곳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은 찾고 싶지 않았다. 켄타의 얼굴에서 사토를 발견하게 될까 봐.
켄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
그 말이 허락인지, 포기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사토와 만나기로 한 곳은 키요스미 정원 근처의 오래된 찻집이었다.
아카리가 정한 장소였다. 학원 근처도, 집 근처도 아니었다. 도망치기 쉬운 곳도 아니고, 너무 조용해서 어색한 곳도 아니었다. 토요일 낮의 찻집에는 중년 부부와 신문을 읽는 노인, 정원 산책을 마치고 들어온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사토는 먼저 와 있었다.
창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는 어제보다 더 작아 보였다. 검은 코트는 어깨가 조금 처져 있었고, 손에는 낡은 가죽 가방이 들려 있었다.
“나카무라 씨.”
이번에는 아카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카리는 그 점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사토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냈다. 테이블 위로 조심스럽게 밀어왔다.
사토 켄지 / 교육출판 기획·편집
아카리는 그 글자를 오래 보았다.
“아직도 교육 쪽 일을 하네요.”
사토는 시선을 내렸다.
“한동안은 떠나 있었어. 오사카에서 잡지 일을 했고, 교재 편집도 했고... 몇 년 전부터 다시 교육 콘텐츠 쪽 일을 맡고 있어.”
“아이들을 상대로요?”
그 말은 낮았지만 날카로웠다.
사토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직접 가르치지는 않아.”
“그게 위로가 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사토의 손가락이 찻잔 옆에서 멈췄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
아카리는 명함을 가방에 넣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두었다. 사토의 이름이 자신 쪽으로 오지 못하게 막아둔 것처럼.
종업원이 홍차와 커피를 놓고 갔다. 둘 다 손대지 않았다.
사토가 먼저 말했다.
“편지를 더 제대로 썼어야 했는데.”
“편지보다 중요한 건, 오지 말았어야죠.”
그는 고개를 숙였다.
“맞아.”
“왜 왔어요?”
사토는 잠시 입술을 눌렀다.
“사과하고 싶었어.”
“누구한테요?”
“너에게... 아니, 나카무라 씨에게. 그리고 켄타 군에게도.”
아카리의 표정이 굳었다.
“그 이름을 쉽게 부르지 말라고 했죠.”
사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찻집 안에서 스푼이 컵에 닿는 소리가 작게 났다. 창밖으로는 정원 입구를 지나는 사람들이 보였다. 누군가는 아이 손을 잡고 있었고,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너무 평범한 토요일이었다.
사토가 천천히 말했다.
“그때는 무서워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어.”
아카리는 숨을 들이켰다.
그 말은 오래 기다린 말이었다. 그런데 막상 들으니 아무것도 고쳐지지 않았다.
“무서웠던 건 당신뿐만이 아니에요.”
사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카리는 계속했다.
“나는 열여섯이었어요. 병원 서류에 부모님이 이름을 써야 했고, 엄마는 밤새 바느질을 했고, 아버지는 새벽마다 트럭을 몰았어요. 당신이 무서워서 도망치는 동안, 우리는 무서워도 밥을 지었어요.”
사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알아.”
“아니요. 당신은 몰라요. 알았다면 적어도 한 번은 연락했겠죠.”
그 말 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토는 가방에서 접힌 종이 몇 장을 꺼냈다. 구청 안내문이었다. 아카리는 첫 장의 제목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
인지신고
사토는 그 종이를 손으로 덮었다. 마치 너무 노골적인 마음을 가리려는 것처럼.
“켄타 군에게... 내 이름을 남길 수 있는지 상의하고 싶었어.”
아카리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름을요?”
“법적으로라도. 늦었지만, 아버지로서...”
“이름 하나 덧붙인다고 아버지가 되는 건 아닙니다.”
사토는 입을 다물었다.
아카리는 구청 안내문을 그쪽으로 밀어 돌려보냈다.
“켄타에게 없는 건 당신 이름만이 아니었어요. 운동회에 오지 않은 사람, 열이 났을 때 병원에 데려가지 않은 사람, 학교 연락표의 빈칸을 대신 설명해주지 않은 사람. 그 모든 순간에 당신은 없었어요.”
사토는 종이를 접지 못했다.
“그걸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뭘요?”
아카리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래서 더 선명했다.
“켄타의 빈칸을 채우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당신의 빈칸을 채우고 싶은 건가요?”
사토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아카리는 가방에서 흰 봉투와 편지지 몇 장을 꺼냈다. 어젯밤 잠들지 못하고 준비해둔 것이었다.
“정말 사과하고 싶다면, 먼저 쓰세요.”
“무엇을?”
“언제 떠났는지. 왜 연락하지 않았는지.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왜 지금인지. 켄타에게 무슨 권리를 원하고, 무엇을 요구하지 않을 건지.”
사토는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그걸... 켄타 군에게 보여줄 생각이야?”
“아직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말로만 사과하지 마세요. 말은 너무 쉽게 도망가니까.”
사토는 편지지를 받아 들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아카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토가 급히 말했다.
“답은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아카리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재촉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에 기다리는 쪽은 당신이니까.”
찻집 문을 열고 나오자, 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아카리는 정원 쪽으로 걷지 않고 곧장 역으로 향했다. 걷는 동안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은 오래도록 차가웠다.
켄타는 집에 있지 않았다.
아카리가 나간 뒤, 그는 한참 식탁 앞에 앉아 있다가 가족 연락표를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은 채 걷다가 결국 구립도서관 옆 작은 공원에 앉았다.
토요일 오후의 공원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모래밭에서는 어린 남자아이가 아버지와 공을 차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부러 공을 천천히 굴려주었고, 아이는 매번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공을 막아낸 사람처럼 웃었다.
켄타는 그 장면을 보다가 괜히 운동화 앞코로 땅을 긁었다.
부럽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부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거짓말 같았다.
“켄타?”
유이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 세 권을 품에 안고 서 있었다. 코트 주머니에는 작은 수첩이 삐져나와 있었고, 가방에는 세이와미디어그룹 출입증 케이스가 아직 들어 있는 듯했다.
켄타는 급히 자세를 고쳤다.
“누나, 오늘도 도서관이에요?”
“응. 세이와 자료랑 졸업 원고 정리하려고. 너는?”
“그냥요.”
유이는 그의 옆에 앉았다. 일부러 너무 가까이 앉지는 않았다. 켄타가 도망칠 수 있는 만큼의 거리를 남겨두었다.
“그냥 공원에 앉아 있는 얼굴은 아닌데.”
켄타는 한참 망설였다.
그리고 말했다.
“아버지 이름이 생길 수도 있대요.”
유이는 숨을 멈췄다.
켄타는 공원 모래밭을 보고 있었다.
“생길 수도 있다는 말도 이상하죠. 이름이 무슨 책상 서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유이는 대답을 고르지 않았다. 서둘러 어른다운 말을 해주면, 그 말이 켄타를 더 혼자 두게 될 것 같았다.
켄타가 물었다.
“이름이 생기면 사람이 달라져요?”
유이는 천천히 말했다.
“이름이 늘어도, 네가 달라지는 건 아니야.”
켄타는 그 말을 듣고 웃지 않았다. 대신 조금 찡그렸다.
“근데 사람들이 다르게 보잖아요.”
“그건 맞아.”
“그럼 결국 달라지는 거잖아요.”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보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어. 하지만 네가 네 자신을 전부 다시 설명해야 하는 건 아니야.”
켄타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유이 누나는 아버지랑 사이 좋아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유이는 잠시 먼 곳을 보았다. 도서관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과, 그 옆에 희미하게 겹친 켄타의 얼굴이 보였다.
“좋다, 나쁘다로 말하기 어려워. 아버지를 좋아하지만, 아버지가 숨긴 시간까지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
켄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도 다 빈칸이 있네요.”
“응. 문제는 그 빈칸을 누구한테 떠넘기느냐인 것 같아.”
켄타는 그 말을 듣고 유이를 보았다.
유이는 요즘 자주 어른처럼 보였다. 취업사진을 찍고, 세이와에 가고, 혼마라는 어른과 마주 앉아 취재를 이어가는 사람. 그런데 이렇게 말할 때의 유이는 이상하게 조금 쓸쓸해 보였다.
켄타는 묻고 싶었다.
혼마 씨는 누나의 빈칸을 채워주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 질문은 자신에게도 너무 노골적이었다.
대신 그는 다른 말을 했다.
“유이 누나도 조심하세요.”
유이는 작게 웃었다.
“또 그 말이네.”
“이번에는 그냥 하는 말 아니에요.”
“알아.”
유이는 가방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세이와 홍보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나도 요즘 이름이 붙은 봉투들을 너무 많이 받아. 누가 준 건지, 왜 준 건지, 계속 확인해야 해.”
“혼마 씨가 준 거예요?”
“오오츠카 씨 통해서 받은 거야.”
켄타는 아주 조금 안심했다. 그 안심이 또 마음에 걸렸다.
유이는 그를 보며 덧붙였다.
“내가 결정할 일은 내가 할게. 대신 혼자서 숨기지는 않을게.”
켄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누나가 자신에게 약속해준 말 같기도 했고, 선을 그어준 말 같기도 했다. 그래서 조금 아팠고, 조금 고마웠다.
월요일 오후, 세이와미디어그룹 1층 공개 라운지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유이는 오오츠카에게 확인 도장이 찍힌 자료 봉투를 받았다. 혼마는 조금 늦게 내려왔다. 손에는 두꺼운 파일이 들려 있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교육 콘텐츠 외부 협력자 목록입니다. 공개 가능한 범위만 정리했습니다.”
오오츠카가 먼저 말했다.
“유이 씨, 이번 자료는 홍보부 경유입니다. 인용할 경우에는 이름 표기 방식 다시 확인해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혼마는 유이가 노트를 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며칠 사이에 그녀의 얼굴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피곤해 보였지만, 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괜찮습니까?”
유이가 고개를 들었다.
“취재 얘기예요?”
“둘 다요.”
유이는 잠시 웃었다.
“그렇게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잖아요.”
“그렇군요. 그럼 취재 얘기부터 하죠.”
혼마는 파일을 펼쳤다. 외부 집필자, 감수자, 편집 협력자 명단이 있었다. 유이는 이름들을 하나씩 따라가다 어느 줄에서 멈췄다.
佐藤健司. (사토 켄지)
이름 자체는 흔했다. 하지만 유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이름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 교육출판 기획·편집. 국어 교재 감수. 아동 독해 콘텐츠 협력.
혼마가 그 시선을 눈치챘다.
“그분은 다음 달 회의에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프리랜서 편집자예요. 예전에는 학원 강사였다고 들었습니다.”
유이는 펜을 멈췄다.
학원 강사.
그 말이 어디선가 걸렸다. 하지만 아직 연결되지 않았다. 연결될 만큼의 정보를 그녀는 갖고 있지 않았다.
혼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요즘 타카하시 씨 질문은 자료를 조금 벗어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벗어나면 안 되나요?”
“아니요. 다만 자료 바깥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료 안에도 있죠.”
혼마는 그 대답에 잠시 웃었다.
“맞습니다.”
라운지 유리창 밖으로 아카사카의 오후가 기울고 있었다. 회사원들이 서류가방을 들고 빠르게 지나갔고, 로비의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혼마가 낮게 말했다.
“당신이 다치는 취재라면, 멈추게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유이는 그를 보았다.
“멈출지 말지는 제가 정합니다.”
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말씀 잘 기억해둘게요.”
그는 정말 잊지 않을 사람처럼 말했다.
그래서 유이는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믿고 싶은 마음과, 그 마음을 의심해야 하는 일은 항상 같이 움직인다.
그날 저녁, 아카리는 오차노미즈역에서 내렸다.
곧장 집으로 가려다 발걸음이 느려졌다. 히지리바시 위에는 퇴근길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다리 아래로는 주오선 전철이 노란 빛을 흘리며 지나갔다.
타카하시는 난간 가까이에 서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둘 다 같은 곳에서 너무 자주 멈춰 섰다. 약속이라고 하기엔, 누구도 먼저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타카하시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나카무라 씨.”
“부장님.”
그는 내일 세이와 자료실에 가야 했다.
별첨 3. 인재 접촉 및 권리 조정 메모.
타카하시에게도, 와타나베에게도 피할 수 없는 문서였다.
그런데도 그는 먼저 묻지 않았다.
아카리가 말했다.
“만나고 왔습니다.”
“그분을요.”
“네.”
“괜찮으십니까?”
아카리는 잠시 생각했다.
“괜찮지는 않은데, 무너지지는 않았어요.”
타카하시는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건 중요한 차이군요.”
아카리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지친 사람의 웃음이었지만, 완전히 무너진 웃음은 아니었다.
“그 사람이 켄타에게 이름을 남기고 싶다고 했어요.”
타카하시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친자인지신고 인가요?”
“네. 구청 안내문까지 가져왔더군요.”
“빠르군요.”
“너무 빨라요. 스스로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서 서두르는 것 같아요.”
둘은 나란히 걸었다. 다리 끝에서 조금 내려가자, 악기점 불빛과 서점 간판이 이어졌다. 1991년의 도쿄는 밤이 되어도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다. 어디에나 형광등과 네온, 자판기 불빛이 있었다.
아카리가 말했다.
“켄타에게 아버지 이름을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데 쉽게 넣어주고 싶지도 않아요. 어느 쪽도 제가 결정해버리면 안 되는 것 같아서.”
타카하시는 한참 뒤에 말했다.
“부모가 된다는 건, 아이 대신 결정하는 일과 아이에게 돌려주는 일을 매일 헷갈리는 일인 것 같습니다.”
“부장님도요?”
“저는 아직도 유이에게 돌려줘야 할 이야기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 말은 내일의 별첨 3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했고, 1971년 전체를 가리키는 것 같기도 했다.
아카리는 그를 보았다.
“무섭습니까?”
타카하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아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는 위로의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섭다는 말을 무섭지 않게 받아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때가 있었다.
타카하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카무라 씨.”
“네.”
“오늘은 역까지 같이 걸어도 되겠습니까?”
아카리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 말은 선을 지키는 말이었다. 동시에 곁에 있겠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흔들렸다.
“네. 역까지는요.”
두 사람은 아주 천천히 걸었다.
손이 닿을 만큼 가깝지는 않았고, 남이라고 하기엔 너무 멀지도 않았다. 그 애매한 간격이 지금의 둘에게는 가장 정확했다.
집에 돌아오자, 켄타는 식탁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가족 연락표는 옆에 접힌 채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메모지 한 장이 있었다. 아카리는 일부러 보지 않으려 했지만, 연필로 썼다가 지운 흔적이 보였다.
佐藤健司. (사토 켄지)
지운 자국은 깨끗하지 않았다. 종이에 눌린 이름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아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켄타가 먼저 물었다.
“만났어?”
“응.”
“뭐래?”
아카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사과하고 싶다고 했어. 그리고 네 이름 옆에 자기 이름을 올릴 수 있는지 묻고 싶다고 했어.”
켄타는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뭐라고 했어?”
“서두르지 말라고 했어. 그리고 네가 결정할 일이라고 했어.”
켄타의 손이 연필을 굴렸다.
“내가 결정하면 엄마는 괜찮아?”
아카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괜찮지 않다고 하면 켄타에게 짐을 얹는 말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말했다.
“어떤 결정이든 쉽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네 결정이 먼저야. 나는 그 옆에 있을게.”
켄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뒤 그가 말했다.
“오늘은 아직 모르겠어.”
“응. 오늘은 몰라도 돼.”
켄타는 메모지를 접어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공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지운 이름도 아직은 버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카리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름은 쓰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더 오래 걸릴 때가 있다.
긴시초의 비즈니스호텔 방에서 사토 켄지는 편지지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카리가 건네준 흰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는 볼펜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다시 들었다.
첫 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랑했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말들은 모두 너무 늦었고, 너무 자신에게 유리했다.
사토는 한참 뒤 첫 문장을 썼다.
나는 도망쳤습니다.
그 문장을 쓰고 나자, 손이 멈췄다.
도망쳤다는 말은 너무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말 뒤에 열여섯 살의 아카리와 갓 태어난 켄타, 밤새 바느질하던 어머니와 침묵하던 아버지가 있었다.
사토는 두 번째 줄을 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창밖으로 전철 불빛이 지나갔다.
그 빛은 방 안에 잠시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동양출판 자료관리위원회 참석자 명단에는 두 이름이 나란히 적혔다.
타카하시 류지.
와타나베 히로시.
그리고 세이와미디어그룹의 외부 협력자 명단 어딘가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
사토 켄지.
아직 서로 만나지 않은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도쿄의 좁은 선로와 골목, 자료 봉투와 출입증 사이에서, 이름들은 이미 서로를 향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라는 이름도,
작성자라는 이름도,
취재자라는 이름도,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름에 맞는 시간을 살아내지 못하면, 이름은 오히려 사람을 다치게 했다.
그리고 이제, 모두가 그 사실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 오늘의 한 문장 — 일본어 학습 박스
1. 会うかどうかは、あなたが決めていい。 [あうかどうかは、あなたが きめていい]
만날지 말지는 네가 정해도 돼.
누군가를 만나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선택권을 돌려줄 때 · 아카리가 켄타에게 친아버지 사토를 당장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건넨 말
2. あの時は、怖くて逃げました。 [あのときは、こわくて にげました]
그때는 무서워서 도망쳤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변명하지 않고 인정하려 할 때 · 사토가 아카리 앞에서 오래전 자신이 책임을 피했다는 사실을 고백한 말
3. 名前を足せば父親になるわけじゃありません。 [なまえを たせば ちちおやに なるわけじゃ ありません]
이름을 더한다고 아버지가 되는 건 아닙니다.
법적 이름이나 형식만으로 관계의 책임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말할 때 · 아카리가 사토의 인지 제안 앞에서 단호하게 선을 그은 말
4. 名前が増えても、君が変わるわけじゃない。 [なまえが ふえても、きみが かわるわけじゃない]
이름이 늘어도 네가 달라지는 건 아니야.
가족관계나 호칭이 바뀌어도 상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안심시킬 때 · 유이가 아버지의 이름 앞에서 흔들리는 켄타에게 조심스럽게 해준 말
5. 答えを急がせないでください。 [こたえを いそがせないでください]
답을 재촉하지 말아주세요.
상대가 중요한 결정을 할 시간을 지켜주고 싶을 때 · 아카리가 사토에게 켄타와 자신의 결정을 서두르게 하지 말라고 말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