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친절이라는 이름의 얼굴
6화, 친절이라는 이름의 얼굴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3

세이와미디어그룹 본관의 유리문은 사람 얼굴을 지나치게 선명하게 비췄다.
타카하시는 회전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유리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낯설었다. 은퇴를 생각하기엔 아직 일이 남아 있었고, 새로 시작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얼굴.
옆에 선 와타나베도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같은 동양출판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같은 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색했고, 남이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함께 알고 있었다.
로비 안쪽에서 오오츠카가 다가왔다. 그는 세이와 홍보부 직원다운 단정한 표정으로 방문증 두 장을 내밀었다.
“타카하시 부장님, 와타나베 이사님. 자료실 열람은 지하 2층입니다. 쿠로다 전무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타카하시는 방문증을 목에 걸었다. 플라스틱 케이스가 셔츠 단추에 부딪히며 작게 소리를 냈다.
오오츠카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늘은 사본 제공 없이 열람만 가능합니다.”
그때 뒤에서 쿠로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열람만 부탁드립니다.”
타카하시는 천천히 돌아섰다.
쿠로다는 예전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중하고, 빈틈없고, 어느 쪽으로도 책임을 완전히 두지 않는 얼굴.
와타나베가 말했다.
“우리가 요청한 건 사본 제공 가능 여부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법무 검토 중입니다.”
“그 말은 이미 들었습니다.”
쿠로다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우선 보시는 겁니다. 보지 않은 상태로는 다음 요청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타카하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벽 너머로 아카사카의 아침이 지나가고 있었다. 양복 입은 사람들, 서류가방, 택시, 공중전화 부스 앞에 선 여직원. 도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움직였다.
하지만 오늘 열릴 파일 하나가, 몇 사람의 지난 이십 년을 다시 움직이게 할 것이다.
지하 2층 자료실은 로비와 전혀 다른 공기를 갖고 있었다.
유리와 대리석 대신 철제 선반과 형광등, 종이 먼지 냄새가 있었다. 방문자는 가방을 맡겨야 했고, 볼펜 대신 연필만 사용할 수 있었다. 오오츠카는 열람 기록지를 펴고 날짜와 시간을 적었다.
쿠로다는 검은 파일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겉표지에는 오래된 라벨이 붙어 있었다.
「1971 별첨 3」
인재 접촉 및 권리 조정 관련 메모
와타나베의 손끝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타카하시는 그 떨림을 보았지만, 모른 척했다.
쿠로다가 파일을 열었다.
첫 장은 회의 참석자 명단이었다. 일부 이름은 검은 줄로 가려져 있었지만, 남은 글자만으로도 충분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神田・Y. (칸다・Y.)
W.H.
K.M.
T.R.案 東洋営業案. (동양 영업안)
地方学校納入網. (지역 학교를 네트워크에 편입)
児童教育書権利調整. (아동 교육 서적 저작권 조정)
新媒体事業案. (신미디어 사업안)
타카하시는 한 줄에서 시선을 멈췄다.
「T.R.案」이라고 쓰였다가, 그 위에 가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옆에는 다른 글씨로 「東洋営業案」이라고 덧붙여져 있었다.
타카하시 류지의 안에서 동양 영업안으로.
한 사람의 이름이 회사 이름으로 바뀌는 데 필요한 선은, 생각보다 얇았다.
와타나베가 낮게 말했다.
“이 글씨... 제가 압니다.”
쿠로다가 그를 보았다.
“오래전 자료입니다. 기억이 섞일 수 있습니다.”
와타나베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가 쓴 부분이 있습니다.”
자료실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오오츠카는 열람 기록지에 조용히 적었다.
‘동양 측, 일부 필체 확인 주장.’
쿠로다가 그 손끝을 보았다.
“오오츠카 양, 기록은 간단히.”
오오츠카는 펜을 멈추지 않았다.
“열람 기록입니다.”
그 짧은 대답에 타카하시는 처음으로 오오츠카를 다시 보았다. 그는 홍보부 직원이었다. 세이와의 사람. 하지만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서는, 본 것을 본 대로 남기려 하고 있었다.
두 번째 장에는 권리 조정 항목이 있었다.
전국 서점망 협력. 학교도서관 납품 루트 조정. 교육·아동서 공동 기획 창구.영상화권 및 음성 자료화 가능성. 신규 매체 사업 검토.
타카하시는 손을 테이블 아래에서 천천히 쥐었다.
그가 젊었을 때 쓴 미래는 여기 있었다.
다만 그의 이름만 없었다.
와타나베가 한 장을 더 넘겼다.
거기에는 짧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T.R. 직접 접촉 보류. W 경유」
와타나베는 숨을 멈췄다.
쿠로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 표현은 당시 업무 흐름을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타카하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업무 흐름이라는 말은 편리하군요.”
쿠로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타카하시는 메모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못 본 걸로는 할 수 없습니다.”
자료실 안의 형광등이 아주 작게 깜박였다.
그 말은 분노보다 차가웠다.
그래서 더 오래 남을 말이었다.
열람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끝났다.
쿠로다는 파일을 닫으며 말했다.
“사본 제공 여부는 다음 주 안에 다시 회신드리겠습니다.”
와타나베가 물었다.
“열람 기록에는 오늘 본 항목명이 들어갑니까?”
오오츠카가 대답했다.
“네. 들어갑니다.”
쿠로다가 그를 바라보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타카하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동양출판은 별첨 3의 사본 제공을 공식적으로 재요청하겠습니다. 특히 ‘T.R.案’ 표기와 ‘W経由’ 표기 부분은 회의록에 남겨주십시오.”
쿠로다는 고개를 숙였다.
“검토하겠습니다.”
“검토가 아니라 기록입니다.”
그 말에 와타나베가 아주 잠깐 타카하시를 보았다. 예전이었다면 자신이 피했을 문장이었다. 회사라는 말 뒤에 숨고, 부서라는 말로 뭉개고, 누구도 다치지 않는 것처럼 포장했을 문장.
하지만 오늘은 피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와타나베는 손안의 연필 자국을 보고 있었다. 자료실에서 빌린 연필이 손끝에 검은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오늘 본 문장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1층에서 열렸을 때, 유이가 로비에 서 있었다.
그녀는 방문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손에는 세이와 홍보부 도장이 찍힌 봉투와 녹음기가 든 가방. 옆에는 혼마가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오오츠카가 다른 파일을 들고 서 있었다.
“아버지.”
유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로비의 유리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타카하시 역시 잠시 멈췄다.
“취재냐.”
“네. 혼마 씨와 지난번 인터뷰 이어서요. 오오츠카 씨 통해서 일정 공유했고요.”
그 말에는 설명 이상의 것이 들어 있었다.
숨기지 않았다는 표시. 절차를 지켰다는 표시. 그리고 아버지가 걱정할 것을 알고 있다는 표시.
혼마가 고개를 숙였다.
“개발부의 혼마입니다. 타카하시 씨 취재를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타카하시는 혼마의 얼굴을 보았다. 이름은 들었다. 유이가 자료실과 쇼룸 취재를 하며 자주 언급한 사람. 개발부 사람. 친절한 사람. 그리고 세이와의 사람.
“딸이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짧은 인사였다. 고맙다는 말처럼 들렸지만, 경계도 담겨 있었다.
혼마는 그걸 알아들었다.
“제가 더 배우고 있습니다.”
쿠로다는 그 장면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타카하시와 유이를 지나 혼마에게 닿았다. 마치 이미 알고 있는 말을 확인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타카하시는 유이에게 말했다.
“업무로서의 선을 명확히 하려무나.”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어요.”
그 대답이 타카하시에게는 다행이면서도 아팠다.
딸은 이미 자신이 모르는 자리에서 어른의 말을 배우고 있었다.
와타나베는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부모가 잃어버린 이름은, 때로 자식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질문은 누구도 완전히 막을 수 없다.
오오츠카는 유이를 라운지 쪽 복도로 안내했다.
로비를 벗어나자 그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개발부 자료가 조금 더 들어갑니다. 다만 공개 도장이 찍힌 것만 사용해주세요.”
“네.”
오오츠카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친절해 보이는 것일수록 출처를 확인하세요.”
유이는 그를 보았다.
“혼마 씨 이야기예요?”
오오츠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자료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람도 가끔은 자료처럼 움직일 때가 있고요.”
유이는 그 말을 노트에 적고 싶었지만 적지 않았다.
오늘은 적지 말아야 할 말들이 많았다.
공개 라운지 안쪽에는 작은 시연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혼마는 지난번보다 더 신중했다. 커피나 홍차를 미리 올려두지도 않았고, 자료도 전부 오오츠카의 도장을 거친 봉투 안에 넣어두었다.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유이를 불편하게 했다.
“오늘은 너무 정식이네요.”
혼마가 웃었다.
“지난번에 배웠으니까요.”
“제가 그렇게 무섭게 말했나요?”
“아니요.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무서웠습니다.”
유이는 녹음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녹음해도 될까요?”
“공개 가능한 설명 부분은 괜찮습니다. 화면의 내부 코드와 미발표 상품명은 메모만 부탁드립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선을 그었다. 유이도 그 선 안에서 질문을 시작했다.
오늘의 시연은 교육용 CD-ROM 개발 화면이었다. 어린이 백과사전, 국어 독해 자료, 학교도서관 검색 시스템. PC-9801 모니터 위에는 파란색 메뉴와 흰 글씨가 떠 있었다. 키보드를 누르면 작가 이름, 책 제목, 관련 음성, 삽화 자료가 차례로 열렸다.
혼마가 말했다.
“책을 데이터로 바꾸면 편리해집니다. 검색도 빠르고, 지역 학교에서도 같은 자료를 볼 수 있고요. 하지만 문제는 칸입니다.”
“칸?”
“이름을 넣을 칸이 없으면, 그 사람은 설명문 뒤로 밀립니다. 저자, 편집자, 감수자, 삽화가, 낭독자, 개발자...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려다 보니 가끔은 개발보다 삭제가 더 무섭습니다.”
혼마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는 회사의 미래를 설명하면서도, 그 미래가 누군가를 지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파일 중간에는 외부 협력자 명단이 있었다.
유이는 이름을 하나씩 따라가다가 어느 줄에서 멈췄다.
佐藤健司. (사토 켄지)
지난 번에 이어 또 다시 보게 된 낮선 이름.
어딘가에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최근 아카리의 표정, 켄타의 가족 연락표 이야기, 빈칸, 아버지라는 이름.
아직 연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취재를 오래 하다 보면, 아직 닿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불편함을 느낄 때가 있다.
혼마가 물었다.
“아는 이름입니까?”
“아직 모르겠어요.”
“아직?”
“네. 아직은요.”
혼마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모니터 화면을 바꾸며 말했다.
“이 자료는 공개 도장이 찍힌 범위 안에서만 사용하세요. 사토 씨 부분도 아직 확정 명단은 아닙니다.”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터뷰가 잠시 끊겼을 때, 라운지에 오후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
혼마는 녹음기가 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했다.
“아까 로비에서 아버님을 뵙고 조금 긴장했습니다.”
유이는 의외라는 듯 그를 보았다.
“혼마 씨가요?”
“네. 저는 세이와 사람입니다. 그 사실이 오늘은 평소보다 크게 느껴졌습니다.”
“혼마 씨는 세이와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냥 혼마 씨이기도 하잖아요.”
혼마는 그 말에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유이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타카하시 류지의 딸이라는 이유로 조심해야 할 취재자였다. 그다음에는 질문을 잘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회사의 말로만 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좋은 마음인지, 위험한 마음인지, 그는 아직 자신할 수 없었다.
혼마가 천천히 말했다.
“회사 사정으로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유이는 그 말을 듣고도 바로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 말이 친절인지, 다른 방식의 통제인지 아직 모르겠어요.”
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가끔 모릅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래서 더 조심하겠습니다. 당신을 멈추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그게 보호인지 겁인지 먼저 생각하겠습니다.”
유이는 녹음기 옆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말은 위험했다.
솔직해서 위험했고, 자신이 그 솔직함에 흔들린다는 것을 알아서 더 위험했다.
“그럼 저도 조심할게요.”
“무엇을요?”
“혼마 씨를 좋은 사람이라고 너무 빨리 정하지 않는 것.”
혼마는 작게 웃었다.
“그건 꽤 공정하네요.”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라운지의 전화벨, 복사기 소리, 로비를 지나는 발걸음. 회사의 소음은 계속되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이상하게 사적인 침묵이 생겼다.
유이는 그것을 끊기 위해 녹음기를 다시 켰다.
“그럼 다음 질문할게요.”
혼마는 자세를 고쳤다.
“네. 취재자님.”
그 호칭이 농담처럼 들렸지만, 유이는 조금 늦게 웃었다.
그 시각, 아키하바라 전자상가의 한 매장 앞에서 켄타는 발을 멈췄다.
워크맨 건전지를 사러 나온 길이었다. 그런데 쇼윈도 안쪽 모니터에 떠 있는 파란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미래의 도서관 CD-ROM 시연’
작은 안내판 옆에는 세이와미디어그룹 로고가 붙어 있었다.
켄타는 유리창 너머로 화면을 보았다. 책 제목을 누르면 설명이 나오고, 작가 이름을 누르면 다른 책 목록이 이어졌다. 옆에서는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초등학생 아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이제 책도 컴퓨터로 찾는 시대야.”
아이가 키보드를 누르자 화면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아이의 손등을 살짝 잡아주었다.
켄타는 그 모습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 보게 되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원래 저렇게 손을 잡아주는 사람인가.
아니면 저 남자도 집에 가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일 수 있나.
그렇다면 이름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건가.
켄타는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어젯밤 적었다가 지우지 못한 이름이 있었다.
佐藤健司. (사토 켄지)
그 이름 아래에 그는 한 줄을 더 적었다.
‘이름이 화면에 뜨면, 그 사람은 있는 사람이 되는 걸까.’
쓰고 나니 유이가 생각났다.
유이는 지금 저 유리빌딩 안에서 이런 화면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혼마라는 사람이 옆에서 설명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켄타는 그 상상을 밀어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질투라는 말은 아직 너무 컸다.
하지만 싫다는 감정은 분명히 있었다.
유이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보다 훨씬 어른인 사람과 같은 화면을 보고 있다는 것이 싫었다.
켄타는 건전지를 사지 않고 매장을 나왔다.
거리에는 전자음과 호객 소리, 게임 음악이 뒤섞여 있었다. 1991년의 아키하바라는 미래를 팔고 있었지만, 켄타에게 미래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마루산 상사 IT추진실에서는 오후 3시가 넘어 전화벨이 울렸다.
미사키가 수화기를 들었다.
“마루산 상사 IT추진실입니다.”
잠시 뒤 그녀가 아카리를 불렀다.
“주임님, 타카하시 유이 씨입니다.”
아카리는 수화기를 받았다.
“나카무라입니다.”
수화기 너머의 유이는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나카무라 씨,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잠깐이면 괜찮아요.”
“세이와 교육 콘텐츠 외부 협력자 명단에서 이름 하나를 봤어요. 아직 확정 명단은 아니고, 공개 도장은 찍혀 있는데... 혹시 확인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서요.”
아카리는 펜을 들었다.
“이름이 뭔데요?”
잠시 침묵.
“사토 켄지 씨요. 교육출판 기획·편집, 예전 학원 강사라고...”
아카리는 숨을 멈췄다.
책상 위의 날짜 도장, 입력 목록, 보류 표시가 한순간 멀어졌다. 유이는 그 이름의 무게를 아직 모른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자료가 사람보다 먼저 도착한 것이다.
아카리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그 이름, 어디서 봤나요?”
유이는 바로 알아차렸다.
“아는 이름인가요?”
아카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세이와 명단에 있었다고 했죠.”
“네. 혼마 씨가 설명해줬고, 오오츠카 씨 확인 도장이 있는 자료예요. 제가 혹시 잘못 건드린 거라면...”
“유이 씨 잘못이 아니에요.”
아카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만 그 이름은... 제 개인적인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직 켄타에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유이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켄타와도 관련이 있나요?”
아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이었지만, 유이는 그 침묵을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더 묻지 않을게요.”
“고마워요. 그리고 자료는 계속 확인해주세요. 자료 안의 이름을 개인적인 이유로 없던 것처럼 하면 안 되니까.”
유이는 잠시 후 말했다.
“네. 하지만 인용은 하지 않겠습니다. 확인될 때까지.”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전화를 끊은 뒤에도 아카리는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미사키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따뜻한 캔커피 하나를 놓고 갔다.
아카리는 그 캔을 보다가 작게 말했다.
“고마워.”
미사키는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업무상 보급품입니다.”
그 농담 같지 않은 농담 덕분에 아카리는 겨우 숨을 쉬었다.
사토의 이름이 세이와 자료에 있었다.
유이가 그것을 봤다.
혼마가 설명했다.
아카리는 처음으로 느꼈다.
자신의 과거가 더 이상 자기 집 서랍 안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동양출판으로 돌아온 타카하시는 열람 보고 메모를 다시 읽었다.
와타나베가 그의 자리 앞에 서 있었다.
“오늘 본 것을 회의록에 어떻게 넣을지 제가 초안을 쓰겠습니다.”
타카하시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회사 문장으로 숨기실 겁니까?”
와타나베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요. 제 이름을 넣겠습니다.”
“전달자라고요?”
“네. 그리고 타카하시 부장이 직접 접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도 넣겠습니다.”
타카하시는 한참 그를 보았다.
“그 문장을 쓰면, 와타나베 씨도 다칩니다.”
“알고 있습니다.”
“쿠로다 씨가 그대로 두지 않을 겁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타카하시는 더 말하지 않았다.
와타나베는 예전보다 작아 보였다. 하지만 처음으로 자기 그림자 안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이 용기인지, 늦은 체념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마루산 상사 나카무라 아카리였다.
업무 전화였다. 세이와 열람 결과에 따라 동양출판 30주년 자료 입력 상태를 어떻게 표시할지 확인하는 내용. 그러나 목소리의 끝이 조금 흔들렸다.
타카하시는 업무 답변을 마친 뒤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아카리가 잠시 침묵했다.
“개인적인 이름이 세이와 자료에 있었습니다.”
타카하시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아카리가 말했다.
“사토 켄지. 켄타와 관련된 사람입니다.”
타카하시는 눈을 감았다.
세이와의 자료실에서 돌아온 날, 또 다른 이름이 세이와의 자료에서 나왔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좁은 도시였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은 원래 그런 식으로 얽힌다. 아무 관련 없는 회사와 집, 아이와 일, 과거와 현재가 어느 날 같은 봉투 안에 담길 수도 있다.
타카하시가 낮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알게 된 내용을 업무와 섞이도록 하지는 않겠습니다.”
아카리는 조용히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자료에 들어온 이상,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럼 분리하려 애쓰기보다, 선을 그어야겠군요.”
“네. 선을요.”
둘은 잠시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침묵했다.
타카하시는 오늘 로비에서 본 유이를 떠올렸다. 방문증을 목에 걸고, 혼마 옆에 서 있던 딸.
아카리는 세이와 명단에서 돌아온 사토의 이름을 떠올렸을 것이다. 둘은 서로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 걱정의 모양은 닮아 있었다.
아이들이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한 이름들 앞에 서게 되는 것.
“나카무라 씨.”
“네.”
“오늘은 혼자 정리하지 마세요.”
아카리는 아주 작게 웃은 것 같았다.
“부장님도요.”
그 말에 타카하시는 수화기를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업무 전화였는데, 끊고 싶지 않았다.
밤이 되자 세이와미디어그룹 본관의 유리창에는 사무실 불빛이 층층이 남아 있었다.
혼마는 개발부 책상 앞에서 외부 협력자 명단을 다시 보고 있었다.
佐藤健司. (사토 켄지)
그 이름 옆에는 다음 달 회의 예정 표시가 붙어 있었다. 그는 유이가 그 이름에서 멈칫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단순한 취재자의 반응이 아니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리 목격한 얼굴이었다.
문이 열리고 쿠로다가 들어왔다.
“아직 있었나.”
“정리할 게 있어서요.”
쿠로다는 혼마의 책상 위 명단을 보았다.
“타카하시 양 취재는 계속 진행하게. 개발부 자료는 그녀가 흥미로워할 거야.”
혼마는 서류를 덮지 않았다.
“그녀를 가까이 두려는 이유가 뭡니까?”
쿠로다는 미소를 지었다.
“취재자가 가까이 있으면 오해를 줄일 수 있지.”
“멀리 있으면 통제하기 어렵다는 뜻입니까?”
“말을 너무 날카롭게 하는군.”
혼마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이용할 생각이라면, 저는 협력할 수 없습니다.”
쿠로다는 잠시 그를 보았다.
“혼마 군. 회사 안에서 누군가를 완전히 이용하지 않고 일하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나?”
혼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사실이어서 더 불쾌했다.
쿠로다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조심하게. 동양출판 쪽 별첨에는 칸다의 오래된 가게 이름도 있다네. 그 이름이 밖으로 나오면, 와타나베도, 타카하시도, 그 가게 여자도, 타카하시 양의 원고도 모두 다칠 수 있어.”
“그래서 숨기자는 겁니까?”
“나는 다치지 않게 하자는 말을 하고 있네.”
혼마는 그 말을 듣고 낮게 말했다.
“그 말, 오늘 제가 한 말과 비슷하군요.”
“그렇다면 자네도 이제 회사의 언어를 배운 거야.”
쿠로다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혼마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유리창 밖으로 아카사카의 밤이 보였다. 낮에는 투명해 보이던 유리빌딩이 밤이 되자 안쪽을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책상, 사람, 서류, 피로한 얼굴들.
친절도 그랬다.
밖에서는 투명해 보이지만, 안쪽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불을 켜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유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노트를 펼쳤다.
오늘 적은 이름들이 줄지어 있었다.
타카하시 류지.
와타나베 히로시.
쿠로다 마사오.
혼마.
오오츠카.
사토 켄지.
그중 사토 켄지 옆에는 아직 아무 설명도 쓰지 못했다.
유이는 펜을 들고 한참 망설이다가, 이름 옆에 작은 문장 하나를 적었다.
‘자료가 사람보다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노트를 닫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역 이름들이 유리 위에 흘러갔다. 오차노미즈, 칸다, 아키하바라. 모두가 이미 지나간 곳 같았고, 앞으로 돌아가야 할 곳 같았다.
같은 시간, 켄타는 아키하바라에서 사지 못한 건전지 대신 빈 주머니를 만지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카리는 수첩 사이에 사토의 이름과 유이의 전화 메시지를 함께 끼워 넣었다.
타카하시는 열람 보고서 첫 줄에 자기 이름을 쓰지 않고 잠시 멈췄다.
와타나베는 회의록 초안의 ‘전달자’ 칸에 자신의 이름을 또렷하게 눌러 써 넣었다.
혼마는 세이와의 유리창 앞에서,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보다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그날 도쿄의 유리빌딩은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친절은 밝았다.
하지만 밝은 것이 모두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 오늘의 한 문장 — 일본어 학습 박스
1. 見なかったことにはできません。 [みなかったことには できません]
못 본 걸로는 할 수 없습니다.
이미 확인한 사실을 없던 일처럼 넘길 수 없을 때 · 타카하시가 자신의 이름이 회사 이름으로 바뀐 흔적을 보고 조용히 한 말
2. 親切に見えるものほど、出所を確かめてください。 [しんせつに みえる ものほど、でどころを たしかめてください]
친절해 보이는 것일수록 출처를 확인하세요.
자료나 호의가 너무 쉽게 다가올 때 그 배경을 확인하라는 조언 · 오오츠카가 유이에게 세이와의 자료와 사람을 조심해서 보라고 말한 장면
3. 会社の都合で、君を傷つけたくありません。 [かいしゃの つごうで、きみを きずつけたく ありません]
회사 사정으로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직의 이해관계 때문에 상대가 상처받을까 걱정될 때 · 혼마가 유이에게 자신이 세이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며 건넨 말
4. その名前、どこで見ましたか。 [その なまえ、どこで みましたか]
그 이름, 어디서 봤나요?
예상치 못한 이름이 다른 곳에서 나왔을 때 출처를 확인하는 말 · 아카리가 유이에게 세이와 자료 속 ‘사토 켄지’라는 이름을 어디서 봤는지 묻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