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니혼고 프렌즈 홈

8화

나는 그의 책장이었다

2026-10-07 · 읽는 시간 약 19분

8화, 나는 그의 책장이었다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3

8화 대표 이미지

월요일 아침, 아카리의 우편함에는 두툼한 갈색 봉투가 꽂혀 있었다.

젖은 신문지와 전기요금 고지서 사이에 끼어 있는 봉투.

발신인 이름을 확인한 순간, 아카리는 열쇠를 쥔 손을 멈췄다.

佐藤健司. (사토 켄지)

그 이름은 이제 엽서나 전화선 너머에만 있지 않았다. 집 현관 앞까지 와 있었다.

켄타는 이미 등교한 뒤였다. 식탁 위에는 빈 밥그릇과 반쯤 마신 보리차 컵이 남아 있었다.

아카리는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한참 바라보았다.

뜯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뜯지 않는다고 그 이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봉투 안에는 편지 한 장과 오래된 작문 원고 복사본, 그리고 세이와미디어그룹 교육콘텐츠 제안서 초안 일부가 들어 있었다.

아카리는 작문 원고 첫 줄에서 숨을 멈췄다.

「私が見た大人」(내가 본 어른)

중학교 3학년 때 학원에서 썼던 글이었다. 바느질하던 어머니의 손, 아버지의 트럭 유리, 밤늦게 불이 꺼지지 않던 부엌. 그때의 자신은 부모를 불쌍히 여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부모에게 들키지 않게 사랑한다고 쓰고 있었다.

원고 가장자리에는 빨간 색연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너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걸 잘 보는구나.」

아카리는 그 글씨를 손끝으로 짚었다.

그 한마디에 얼마나 오래 매달렸던가.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君の文章を、まだ覚えています。(네 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아카리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다음 장은 더 불편했다. 세이와 교육콘텐츠 회의용 초안.

‘관찰력이 뛰어난 청소년 작문 사례’라는 제목 아래, 이름이 지워진 문장이 몇 줄 옮겨져 있었다.

개인정보는 삭제 가능, 원문 사용 여부 추후 협의.

사토는 아직 사용한 것이 아니라고 썼다.
허락 없이 쓰지 않겠다고도 썼다.
하지만 그 말을 믿기 전에, 아카리는 먼저 깨달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문장으로 보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글.
삶이 아니라, 사례.
상처가 아니라, 교재가 될 수 있는 소재.

아카리는 의자에 앉았다. 부엌 형광등 아래에서 오래된 복사본의 글자들이 너무 선명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일기 속 문장이 떠올랐다.

「私は本棚だった。」(나는 책장이었다)

1974년 겨울, 사토는 학원 교실 뒤편 작은 책장 앞에 서 있었다.

정육점 2층의 그 교실에는 참고서와 문제집, 낡은 문학전집 몇 권이 꽂혀 있었다. 아이들은 그 책을 거의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카리는 가끔 수업 전 일찍 와서 책표지를 훑어 보곤 했다.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미야자와 겐지.

읽어본 책보다 읽지 못한 책이 많았다. 그래도 책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사토는 아카리의 작문 노트를 들고 말했다.

“네 안에는 좋은 책장이 들어 있어.”

아카리는 그 말이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책장이요?”

“응. 좋은 문장, 좋은 풍경,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표정이 제대로 꽂혀 있어. 그런 사람은 나중에 뭘 써도 쓸 수 있어.”

그 말에 아카리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때는 몰랐다.
누군가 자신 안에 책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이 언젠가 마음대로 책을 꽂고, 마음대로 꺼내갈 수도 있다는 것을.

열여섯 살의 아카리는 그 말이 자신을 발견해준 말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의 아카리는, 그 말이 얼마나 오래 자신을 묶어두었는지 겨우 이해하고 있었다.

마루산 상사 IT추진실의 오전은 평소보다 빠르게 흘렀다.

아카리는 사토의 봉투를 회사 가방 안쪽에 넣은 채 출근했다. 업무용 플로피와 출력 목록, 동양출판 자료 입력 로그 사이에 사적인 봉투가 끼어 있는 것이 불편했다. 가방을 열 때마다 그 이름이 보였다.

미사키는 금방 알아차렸다.

“주임님, 오늘 괜찮으세요?”

아카리는 모니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괜찮아 보이려고 노력 중이야.”

“그럼 별로 안 괜찮으신 거네요.”

아카리는 작게 웃었다.

후배가 이 정도로 자신을 읽게 된 것이 기특하면서도 조금 무서웠다. 사람은 같이 일하다 보면 업무 습관보다 먼저 숨기는 방식을 배우게 된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아카리는 잠시 손을 멈췄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마루산 상사 IT추진실, 나카무라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사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봉투, 받았습니까?”

아카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받았습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당신 글을 돌려주고 싶어서...”

아카리는 그의 말을 끊었다.

“오늘 만날 수 있습니까.”

사토가 잠시 침묵했다.

“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진보초. 오후 6시. 사람이 있는 곳에서요.”

아카리는 장소를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미사키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대신 출력된 자료 한 묶음을 들고 와 말했다.

“동양출판 자료, 처리 로그 여기까지 확인했습니다. 주임님 사인은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고마워.”

“고맙긴요, 기본이죠.”

지난번과 비슷한 말투였다. 아카리는 이번에도 그 농담 같지 않은 농담 덕분에 조금 숨을 쉬었다.

가방 안쪽의 봉투는 여전히 무거웠다.

같은 시각, 세이와미디어그룹 개발부에서는 혼마가 외부 협력자 제안서 파일을 넘기고 있었다.

제안서 표지에는 사토 켄지의 이름이 있었다.

「청소년 관찰문을 활용한 국어 독해 콘텐츠」
협력안: 사토 켄지

혼마는 두 번째 장에서 손을 멈췄다. 익명 처리된 학생 작문 예시.

문장은 좋았다. 어린 학생이 썼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사람의 피로와 침묵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문장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불편했다.

좋은 문장이라서 쓰고 싶은 것.
바로 그것이 가장 위험했다.

오오츠카가 홍보부 파일을 들고 개발부로 들어왔다.

“혼마 씨, 오늘 오후 타카하시 유이 씨가 지난 공개 시연회 후속 인터뷰로 옵니다. 일정 공유돼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오오츠카는 혼마 앞의 제안서를 보았다.

“사토 씨 자료입니까?”

“네. 이 작문 예시, 출처 확인이 필요합니다. 본인 동의서도 없고요.”

“익명 처리라고 되어 있네요.”

혼마는 서류를 덮지 않은 채 말했다.

“지운다고 다 괜찮아지는 건 아닙니다.”

오오츠카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 말은 홍보부 직원으로서도, 사람으로서도 반박하기 어려웠다.

“보류 처리하시겠습니까?”

“네. 적어도 본인 확인 전까지는요.”

그때 쿠로다가 개발부 문 앞에 나타났다.

“무엇을 보류한다는 건가?”

혼마는 제안서를 책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사토 켄지 씨의 청소년 작문 예시 사용안입니다. 동의 확인이 없습니다.”

쿠로다는 서류를 훑어보았다.

“이름은 지워져 있군.”

혼마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름을 지운다고 사람이 지워지는 건 아닙니다.”

쿠로다는 웃지 않았다.

“혼마 군, 요즘 자네 말투가 점점 타카하시 양을 닮아가네.”

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칭찬인지 경고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다.

쿠로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료를 너무 깨끗하게 다루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 한다네.”

“더러워진 자료를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오오츠카가 잠시 숨을 멈췄다.

쿠로다는 혼마를 한참 바라보다가 제안서를 내려놓았다.

“좋아. 보류하게. 하지만 타카하시 양에게 이 문제를 먼저 말하지는 말게.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어.”

혼마는 조용히 대답했다.

“오해가 아니라 확인이 필요할 뿐입니다.”

쿠로다는 더 말하지 않고 나갔다.

혼마는 책상 옆 도장함에서 붉은 보류 도장을 꺼냈다. 망설이지 않았다.

쾅. 사용 보류.

도장 소리가 개발부 안에 짧게 울렸다.

그 소리에 혼마 자신도 조금 놀랐다.

누군가를 지키려는 마음이 정말 상대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적어도 하나를 멈췄다.

그는 그 사실에 기대고 싶었다.

유이는 오후 2시에 세이와 1층 공개 라운지에 도착했다.

오오츠카는 평소처럼 자료 봉투를 건넸고, 혼마는 조금 늦게 내려왔다. 그의 손에는 도장이 찍힌 얇은 파일이 있었다. 유이는 그 파일 표지를 보았다.

「使用保留」(사용 보류)

“무슨 자료예요?”

혼마는 잠시 망설였다.

“오늘 인터뷰 주제와 관련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럼 왜 들고 오셨어요?”

“제가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려고요.”

유이는 그 말을 듣고 녹음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건 취재인가요, 고백인가요?”

혼마는 조금 당황한 듯 웃었다.

“둘 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둘 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오츠카는 두 사람 사이를 보고 잠시 물러났다. 완전히 자리를 비우지는 않았다. 멀지 않은 테이블에서 다른 자료를 정리하며, 필요한 경우 개입할 수 있는 거리만 유지했다.

혼마가 말했다.

“사토 켄지 씨가 제출한 교육 콘텐츠 제안서가 있습니다. 예전 학생의 작문을 예시로 쓰는 안입니다. 이름은 지워져 있지만, 동의 확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류했습니다.”

유이의 표정이 굳었다.

“그 학생이 누군지 아세요?”

“아직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타카하시 씨가 며칠 전 사토 씨 이름을 보고 멈췄던 이유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이는 손끝을 노트 위에 올려놓았다.

아카리. 사토. 학원. 작문.

조각들이 너무 빨리 맞물리려 했다. 유이는 그 속도를 의심했다. 취재자는 빠른 연결을 좋아하지만, 사람의 상처는 너무 빨리 연결하면 또 한 번 다친다.

“나카무라 씨에게는요?”

“아직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회사 자료라서 함부로 개인에게 전달할 수 없고, 반대로 회사 안에서만 묻어둘 수도 없어서요.”

“그래서 저한테 말하는 건가요?”

혼마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유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경계가 있었다.

혼마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을 통해 누군가를 움직이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그럼 왜요?”

“당신이 이 취재에서 계속 이름이 빠지는 방식을 보고 있으니까요. 이 경우도 같은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라운지 바깥으로 회사원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유리벽에 비친 혼마의 얼굴은 평소보다 피곤해 보였다. 그는 세이와의 사람이었지만, 세이와 전체는 아니었다. 그 점이 유이를 흔들리게 했다.

혼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에게만큼은, 좋은 인상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이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 말도 조심해야 해요.”

“네.”

“좋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좋은 행동을 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상대를 자기 쪽으로 끌어오고 싶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혼마는 아주 작게 웃었다.

“오늘도 혼났네요.”

“혼낸 거 아니에요.”

“압니다. 그래서 더 담아 두게 되네요.”

유이는 결국 녹음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늘 이 대화는 취재로 남기기에는 너무 사적이었고,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중요했다.

그녀는 노트 가장자리에만 짧게 적었다.

‘보류. 동의. 이름을 지워도 사람은 남는다.’

켄타의 학교에서는 국어 시간에 새 작문 과제가 나왔다.

제목은 칠판 가운데에 크게 적혔다.

「내가 본 어른」

켄타는 연필을 쥔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옆자리 스도는 벌써 아버지가 야구 경기 중계를 보며 혼자 해설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앞자리 학생은 담임 선생에 대해 쓰는 듯했다. 교실 안에는 연필 긁는 소리가 비처럼 이어졌다.

켄타의 종이는 비어 있었다.

내가 본 어른.

엄마. 유이 누나. 혼마 씨. 사토 켄지.

이름은 많았다. 하지만 아무도 쉽게 쓸 수 없었다.

켄타는 종이 아래쪽에 아주 작게 적었다.

‘어른은 자기가 틀린 일을 좋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문장을 쓰고 나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너무 미워하는 말 같았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수업이 끝난 뒤 그는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방과 후, 켄타는 도서관 대신 진보초 쪽으로 걸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유이가 자주 가는 중고서점 거리를 걸으면, 마음이 조금 정리될 것 같았다.

헌책방 앞에서 그는 유이를 만났다.

유이는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출판과 저작권’이라는 낡은 책이었다. 그녀는 켄타를 보자마자 그의 표정을 읽었다.

“오늘 또 난해한 얼굴이네.”

켄타는 책방 앞 좁은 처마 아래로 들어왔다.

“작문 숙제요.”

“무슨 제목인데?”

“내가 본 어른.”

유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건 어렵다.”

“유이 누나는 쓰라면 누구 쓸 거예요?”

“요즘은 너무 많아서 못 쓰겠어.”

켄타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누가 엄마 이야기를 멋대로 쓰면 싫을 것 같아요.”

유이는 손에 든 책을 내려다보았다.

“응. 싫을 거야.”

“근데 유이 누나도 사람들 이야기 쓰잖아요.”

그 말은 날카로웠지만, 비난은 아니었다. 켄타는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유이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서 요즘 무서워.”

“무서워요?”

“응. 누군가의 이름을 돌려주려고 쓰다가, 내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또 가져가고 있는 건 아닌지.”

켄타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안 쓰면 되잖아요.”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안 쓰면 어떤 이름은 계속 빠진 채로 남아. 그래서... 써도 되는지 계속 물어야 하는 것 같아.”

켄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늘도 유이에게서 선을 느꼈다. 다정하지만 자신 쪽으로 완전히 오지 않는 선. 예전 같으면 그 선이 서운하기만 했을 것이다.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 선 때문에 자신도 함부로 밀고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유이는 책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쓰려면, 그 사람이 말하지 않는 이유도 같이 지켜줄 줄 알아야 해.”

켄타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몇 번 되풀이했다.

말하지 않는 이유.

그것도 어쩌면 작문이 될 수 있을까.

오후 6시, 진보초의 오래된 헌책방 안쪽 찻집에서 아카리는 사토를 기다렸다.

가게 안에는 책 냄새와 커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벽 한쪽에는 문학전집이 천장까지 꽂혀 있었고, 계산대 옆 라디오에서는 낮은 음질의 재즈가 흘렀다. 창밖으로는 퇴근길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지나갔다.

사토는 정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는 아카리 앞에 앉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봉투는...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아카리는 갈색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설명이 부족했던 게 아니에요. 허락이 없었죠.”

사토는 입술을 눌렀다.

“아직 사용한 건 아닙니다.”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닙니다.”

아카리는 작문 복사본을 꺼냈다.

“당신은 이걸 왜 가지고 있었어요?”

사토는 종이를 보았다.

“버릴 수 없었어. 그때의 당신 글이... 정말 좋았으니까.”

아카리는 그 말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으려 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그 말에 다시 열여섯 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글을, 그리고 자신을 알아봐준 사람.

그러나 지금의 아카리는 그의 칭찬 뒤에서 사라진 시간을 먼저 보았다.

“당신이 기억한 건 제가 아니라 문장이에요.”

사토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 나는...”

“그렇게 말해야 해요.”

아카리는 그의 말을 막았다.

“당신은 내 글을 기억했어요. 내가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몰랐죠. 켄타가 열이 났을 때도, 학교에서 보호자를 찾을 때도, 사람들이 왜 남편이 없냐고 물었을 때도 당신은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내 글을 ‘좋은 사례’로 다시 꺼내요?”

사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건... 이 글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어서야.”

“돌려준다고요?”

아카리는 아주 낮게 웃었다.

“돌려준다고 말하면, 앗아간 시간이 돌아오나요?”

사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카리는 봉투에서 세이와 제안서 초안을 꺼냈다.

“우리 일을 교재로 만들지 마세요. 내 글도, 켄타의 출생도, 당신의 후회도. 전부 당신이 정리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사토의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떨렸다.

“나는 정말 미안해서...”

“미안하다면 당장 멈추세요.”

그 말은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아카리는 천천히 말했다.

“저는 책장이 아닙니다.”

사토가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뭐라고요?”

“옛날에 당신이 말했죠. 내 안에는 좋은 책장이 있다고. 그때는 그 말이 좋았어요. 누군가 나를 알아본 줄 알았으니까.”

아카리는 작문 복사본을 손끝으로 짚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어요. 당신은 내 안에 당신이 좋아하는 문장만 꽂아두고 있었어요. 필요할 때 꺼내고, 보고 싶을 때 펼치고, 미안해지면 다시 돌려주는 식으로.”

사토는 고개를 숙였다.

긴 침묵이 흘렀다.

가게 안쪽에서 커피잔 놓는 소리가 들렸다. 책장 사이를 지나가던 손님이 낮은 목소리로 책값을 물었다.

세상은 늘 그렇듯, 누군가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다.

사토가 마침내 말했다.

“내가... 보관한 게 아니라 붙잡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어.”

처음으로 조금 다른 말이었다.

아카리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방금 그 말만큼은 피하지 않고 나온 말 같았다.

사토는 가방에서 다른 봉투 하나를 꺼냈다.

“원본이야. 복사본도 내가 가진 건 전부 넣었어. 세이와 쪽 제안서는 철회할게. 문서로도 남길게.”

아카리는 봉투를 바로 받지 않았다.

“받을지 말지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사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는 봉투를 테이블 위에 두었다. 아카리는 잠시 뒤 그것을 가방에 넣었다.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에게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사토가 말했다.

“켄타 군에게도 언젠가...”

아카리가 그를 보았다.

사토는 말을 바꾸었다.

“나카무라 켄타 씨에게도, 내가 직접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을 것 같아. 하지만 그건 그쪽이 정할 일이겠지.”

아카리는 처음으로 그의 문장을 고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녀는 찻집을 나왔다.

비는 그쳐 있었지만, 헌책방 거리의 보도블록은 젖어 있었다. 책방 간판의 불빛이 물 위에 흐릿하게 비쳤다.

아카리는 가방 안의 봉투를 느꼈다.

글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열여섯 살의 자신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건 이제 자신이 데리러 가야 할 사람이었다.

헌책방 거리 끝에서 타카하시와 마주친 것은 거의 우연이었다.

그는 한 손에 낡은 출판연감 한 권을 들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비닐봉지. 책방에서 막 나온 얼굴이었다.

“나카무라 씨.”

아카리는 조금 놀라 웃었다.

“부장님은 여기 자주 오세요?”

“요즘은 자료를 핑계로 옵니다.”

“자료를 핑계로요?”

“네. 사실은 오래된 책 사이에 있으면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거든요.”

아카리는 그 말이 뜻밖에 좋아서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타카하시는 그녀의 가방 쪽을 보았다. 봉투가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묻지 않았다.

그 점이 고마웠다.

아카리가 먼저 말했다.

“사토 씨를 만나고 왔습니다.”

“그러셨군요.”

“예전 제 글을 가지고 있었어요. 세이와 교육 콘텐츠에 쓰려고 했더군요. 아직 사용한 건 아니지만.”

타카하시의 표정이 굳었다.

“막으셨습니까?”

“네. 오늘은 막았습니다.”

“그건 큰일을 하신 겁니다.”

아카리는 고개를 저었다.

“큰일이라기보다... 빼앗겼던 제 책 한 권을 제 책장에 돌려 놓은 기분이에요.”

타카하시는 천천히 걸음을 맞췄다.

둘은 젖은 고서점 거리 위를 나란히 걸었다. 신호등이 바뀌는 동안, 맞은편 서점의 노란 불빛이 두 사람 얼굴 위에 잠시 머물렀다.

아카리가 낮게 말했다.

“저는 제가 그 사람을 사랑했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정말 그랬겠죠. 하지만 그 사랑 안에서 저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좋아하는 문장이었던 것 같아요.”

타카하시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침묵은 대답을 고르기 위해서라기보다 상대방의 감정을 마음대로 판단하지 않으려는 정성처럼 느껴졌다.

“좋아했던 일과 상처받은 일은 동시에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아카리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둘 다 남으면 너무 복잡해요.”

“사람은 원래 복잡해서, 회사 문서처럼 한 줄로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부장님답네요.”

“칭찬입니까?”

“오늘은요.”

타카하시는 희미하게 웃었다.

잠시 뒤 아카리가 말했다.

“부장님은 유이 씨 글을 읽을 때 무섭지 않으세요?”

“매번 무섭습니다.”

“그래도 읽으세요?”

“제 이름이 들어간 글이기도 하지만, 딸이 자기 이름으로 쓰는 글이니까요.”

아카리는 타카하시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타카하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까지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아카리의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네. 같이 가주세요.”

그 말은 자신도 모르게 나왔다.

타카하시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걸음 속도를 아주 조금 늦췄다.

두 사람은 손을 잡지 않았다.
하지만 아카리는 아주 오랜만에, 자기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무겁지 않게 느꼈다.

늦은 밤, 스낵 “雪”의 책장 아래쪽에서 마마는 낡은 양철 상자를 꺼냈다.

와타나베는 카운터에 앉아 물만 마시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 말을 잘못할 것 같았다.

마마는 상자 뚜껑을 열지 않은 채 말했다.

“당신이 찾는 게 여기 있을지도 몰라요.”

와타나베는 숨을 삼켰다.

“영수증입니까?”

“영수증, 명함, 손님들이 두고 간 메모. 밤장사는 그런 걸 바로 버리면 안 되는 때가 있어요.”

“왜 지금까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마마가 그를 보았다.

“말하면 누가 지켜줬을 건데요?”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마는 손가락으로 상자 뚜껑을 천천히 두드렸다.

“다음에 올 때는 타카하시 씨도 같이 와요. 이건 당신 혼자 볼 물건이 아니에요.”

와타나베는 고개를 숙였다.

“네.”

마마는 담배를 꺼내려다 다시 넣었다.

“책장도 그래요. 오래 닫아두면 먼지가 쌓여요. 문을 닫아 두었다 해서 안에 든 게 다 깨끗한 건 아니죠.”

와타나베는 양철 상자를 바라보았다.

1971년의 밤들이 그 안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신이 회사라는 이름으로 숨겼던 얼굴들도.

아카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 켄타는 식탁에서 작문 숙제를 쓰고 있었다.

종이 위 제목은 ‘내가 본 어른’이었다.

아카리는 옷을 갈아입기 전에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

“켄타.”

켄타가 고개를 들었다.

“응.”

“오늘 사토 씨를 만났어. 내 예전 글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교육 콘텐츠에 쓰려 했어. 내가 막았어.”

켄타의 표정이 굳었다.

“엄마 이야기를?”

“응. 그리고 네 이야기와도 이어질 수 있는 일이었어. 그래서 말해둬야 한다고 생각했어.”

켄타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 사람은 왜 자꾸 뭘 쓰려고 해?”

아카리는 의자에 앉았다.

“자기가 잘못한 일을 글로 정리하면 조금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라. 하지만 정리한다고 책임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켄타는 한참 뒤 물었다.

“엄마는 그 사람을 좋아했어?”

아카리는 예상한 질문이었지만, 막상 들으니 가슴이 아팠다.

거짓말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켄타가 짊어지지 않아도 될 방식으로 말해야 했다.

“좋아했어. 그때의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알아봐준다고 믿었어.”

켄타의 얼굴이 흔들렸다.

아카리는 서둘러 덧붙이지 않았다. 변명처럼 들릴까 봐.

대신 아주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했던 일과, 그 사람이 한 잘못은 다른 일이야. 그걸 섞어서 너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아.”

켄타는 손끝으로 종이 모서리를 만졌다.

“그럼 나는...”

켄타가 어렵게 말했다.

“나는 뭐야?”

아카리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너는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생긴 결과가 아니야.”

켄타는 눈을 깜박였다.

아카리는 천천히 힘을 주어 말했다.

“너는 너야. 내가 낳았고, 엄마한테 하나 뿐인 가족이 되어 준 아들. 그 사람이 도망친 일과 네가 태어난 일은 같은 문장으로 묶으면 안 돼.”

켄타는 고개를 숙였다.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얼굴이었다.

아카리는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안아도 되는지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안아도 돼?”

켄타는 대답하지 않고 조금 몸을 기울였다.

아카리는 그제야 아들을 안았다.

켄타는 예전보다 컸다. 팔 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아카리는 잠시 그를 안고 있었다. 열여섯의 자신이 처음 안았던 아이와, 지금 눈앞의 사춘기 소년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믿기지 않았다.

잠시 뒤 켄타가 작게 말했다.

“엄마 글, 언젠가 읽어도 돼?”

아카리는 봉투를 보았다.

“언젠가. 내가 읽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때.”

켄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켄타는 작문 첫 줄을 이렇게 썼다.

‘내가 본 어른은, 비록 늦어지게 됐더라도 도망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혼마가 보류한 제안서.
아카리의 과거.
켄타의 작문.
타카하시의 이름.
세이와의 자료실.
그리고 마마의 아직 열리지 않은 양철 상자.

모든 것이 책장처럼 서로 다른 칸에 꽂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칸이 아니라, 누가 그 책을 꺼낼 권리를 갖는가였다.

유이는 노트 맨 아래에 썼다.

‘이름을 돌려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내가 대신 정리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아직 묻지 않은 이야기는, 아직 쓰지 않는다.’

창밖으로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도쿄의 밤은 오늘도 많은 이름을 품고 지나갔다.
어떤 이름은 서류에 남았고, 어떤 이름은 아직 상자 안에 있었고, 어떤 이름은 드디어 자기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다고 해서 곧바로 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래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꺼내면,
먼저 먼지가 날리는 법이니까.


📚 오늘의 한 문장 — 일본어 학습 박스

1. 君の文章を、まだ覚えています。 [きみの ぶんしょうを、まだ おぼえています]
네 글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상대가 쓴 글이나 말을 기억하고 있다고 전할 때. 하지만 기억이 곧 책임을 뜻하는 것은 아님 · 사토가 아카리에게 오래된 작문 원고를 보내며 쓴 말

2. 消せば安全になるわけじゃありません。 [けせば あんぜんに なるわけじゃ ありません]
지운다고 안전해지는 건 아닙니다.
이름이나 개인정보를 지워도 당사자의 동의와 맥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때 · 혼마가 사토의 작문 활용 제안서를 보류하며 한 말

3. 覚えていたのは、私じゃなくて文章です。 [おぼえていたのは、わたしじゃなくて ぶんしょうです]
당신이 기억한 건 제가 아니라 문장이에요.
누군가가 나라는 사람보다 내가 남긴 결과물만 기억한다고 느낄 때 · 아카리가 사토에게 오래된 칭찬이 자신을 지켜준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 장면

4. 私は本棚じゃありません。 [わたしは ほんだなじゃ ありません]
저는 책장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취향이나 후회를 마음대로 꽂아두는 존재가 아니라고 선을 그을 때 · 아카리가 사토에게 자신을 더 이상 그의 기억과 문장 보관함으로 대하지 말라고 말한 장면

5. あなたは、誰かの失敗の結果じゃない。 [あなたは、だれかの しっぱいの けっかじゃない]
너는 누군가의 실패의 결과가 아니야.
자신의 출생이나 존재를 어른들의 잘못과 동일시하려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 · 아카리가 켄타에게 사토의 도망과 켄타의 존재는 같은 문장으로 묶일 수 없다고 말해준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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