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니혼고 프렌즈 홈

9화

마마의 영수증

2026-10-07 · 읽는 시간 약 16분

9화, 마마의 영수증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3

9화 대표 이미지

스낵 “雪”의 간판 불은 아직 켜지지 않았다.

오후 5시 40분. 칸다역 뒤편 골목에는 퇴근길보다 먼저 저녁 냄새가 내려앉고 있었다.

튀김집 기름 냄새, 담배 연기, 빗물 마른 아스팔트 냄새.

마마는 카운터 안쪽에서 유리잔을 닦다가, 벽장 아래칸을 열었다.

양철 상자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오래된 과자 상자였다. 뚜껑에는 색이 바랜 벚꽃 그림이 남아 있었고, 모서리는 여러 번 열고 닫힌 탓에 조금 휘어 있었다. 마마는 상자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한참 손을 얹고 있었다.

영수증, 명함, 성냥갑, 손님이 두고 간 쪽지.
모두 버릴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밤장사를 오래 하면 알게 된다.
사람들은 취하면 말을 흘리고, 다음 날 모른 척한다.
그때 흘린 말이 누군가의 생계를 망칠 수도 있고, 누군가의 거짓말을 막을 수도 있다.

오후 6시가 조금 지나,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울렸다.

와타나베가 먼저 들어왔다. 검은 코트 어깨에 빗방울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뒤로 타카하시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같은 회사 사람이었지만, 가게 문을 닫고 들어오는 모습은 전혀 닮지 않았다.

와타나베는 죄를 들고 들어오는 사람 같았고, 타카하시는 오래전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온 사람 같았다.

마마가 카운터 앞 의자를 가리켰다.

“오늘 술 주문은 안 받습니다.”

와타나베가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타카하시는 조용히 인사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마마는 웃지 않았다.

“늦은 건 시간이 아니죠.”

그 말에 와타나베의 얼굴이 굳었다.

마마는 양철 상자 위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옛날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요?”

타카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마마는 상자를 열지 않은 채, 먼저 1971년의 어느 밤을 떠올렸다.

“그날도 비가 왔어요. 늦가을이었고, 코트를 입은 젊은 남자가 먼저 왔죠. 와타나베 씨, 지금보다 훨씬 말랐고 눈이 날카로웠어요.”

와타나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뒤에 세이와 쪽 사람이 왔어요. 쿠로다 씨. 그때도 웃는 얼굴이었죠. 잘 웃는 사람은 꼭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술집에서는 그걸 빨리 배워요.”

마마는 그제야 상자 뚜껑을 열었다.

안쪽에는 노랗게 변한 영수증 묶음이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성냥갑 몇 개, 명함, 컵받침, 작은 수첩 조각도 있었다. 마마는 손이 기억하는 순서대로 종이를 꺼냈다.

첫 번째 영수증.

1971년 11월 18일.
스낵 雪.
맥주 4, 위스키 2, 안주.

뒷면에는 마마의 글씨가 있었다.

「동양 W님, 세이와 K님」

와타나베가 숨을 들이켰다.

두 번째는 성냥갑이었다. 뒷면에 연필로 적힌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T.R. 오지 않음. W만」

타카하시의 손이 아주 작게 멈췄다.

마마가 말했다.

“그때 저는 이름 전체를 몰랐어요. 손님들이 이니셜로 말했으니까요. T.R.이라고만 들었어요. 나중에 알았죠. 타카하시 류지.”

타카하시는 성냥갑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날 자신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은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와타나베가 낮게 말했다.

“제가 있었습니다.”

“그건 여기 적혀 있어요.”

마마는 세 번째 종이를 꺼냈다. 작은 컵받침이였다. 술잔 물자국이 둥글게 남아 있었고, 그 옆에 검은 펜 글씨가 있었다.

「본인 제외하고 진행. 동양 측은 W 경유」

타카하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와타나베는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만질 자격이 없는 것처럼.

“이건 쿠로다 씨 글씨입니까?”

마마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겠어요. 저는 필적 감정가가 아니니까. 다만 그날 그 테이블 위에 있었고, 계산할 때 컵 밑에 깔려 있었어요. 버리려다가 안 버렸죠.”

“왜 보관하셨습니까?”

마마는 와타나베를 보았다.

“왜 이제 묻죠?”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마는 영수증들을 다시 정리하며 말했다.

“밤에는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조금씩 내려놓고 술을 마셔요. 회사 이름, 직함, 결혼반지, 거짓말, 그런 것들을 잠깐 테이블 위에 풀어놓죠. 저는 그런 걸 주워다 팔려고 이 일을 한 게 아니에요. 다만... 버리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밤이 있어요.”

그녀는 타카하시를 보았다.

“그날은 그랬어요.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 이름으로 무슨 결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타카하시는 말이 없었다.

분노는 늦게 왔다.
분노보다 먼저 온 것은 어이없음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슬픔이 왔다.

자신이 모르는 자리에서 자기 이름이 불렸다는 사실.
그 이름이 곧 회사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걸 기억한 사람이, 회사 임원도 동료도 아닌 칸다 골목의 작은 술집 사장이였다는 사실.

타카하시는 마마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래 가지고 계셔서 고맙습니다.”

마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도 조심해서 하세요. 저는 영웅이 아니에요. 무서워서 말하지 않은 날도 많았으니까.”

와타나베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당신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마마는 그를 바라보았다.

“끌어들인 게 아니에요. 나는 봐버린 거예요. 뜻하지 않게 무언가를 본 사람은 늘 조금씩 다쳐요.”

와타나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마는 상자 뚜껑을 완전히 열어두지 않았다. 절반만 열었다. 그 자체가 선 같았다.

“복사해가고 싶겠죠.”

와타나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능하다면... 자료관리위원회에 제출해야 합니다.”

마마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제 손을 떠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타카하시가 말했다.

“원본은 여기에 두어 주세요.”

와타나베가 그를 보았다.

타카하시는 마마에게 말했다.

“복사본이 필요하다면, 마마가 정한 장소에서, 마마가 보는 앞에서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게 이름과 마마의 이름은 동의 없이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마마는 한참 타카하시를 보았다.

“당신은 지금 자기 이름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인데, 남의 이름은 숨겨도 된다고 말하는군요.”

“숨기는 게 아니라, 주인이 정하게 하려는 겁니다.”

마마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 말, 마음에 드네요.”

와타나베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손이 떨렸다. 그는 빈 페이지에 짧게 썼다.

「1971년 11월 18일, 스낵 雪 영수증 및 메모 확인. 동석자: 와타나베 히로시, 쿠로다 마사오. 타카하시 류지 부재 표기 확인. 원본은 점주 보관. 복사는 점주 동의하에 별도 진행.」

그리고 마지막 줄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와타나베 히로시.

이번에는 회사명 뒤에 숨지 않았다.

마마는 그 수첩을 보고 말했다.

“이제야 이름을 쓰네요.”

와타나베는 고개를 숙였다.

“너무 늦었습니다.”

“늦은 건 맞아요.”

마마가 상자를 닫았다.

“하지만 늦었다고 해서, 안 해도 되는 건 아니죠.”

그 시각 유이는 대학 도서관 복도 끝 공중전화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전화카드가 들려 있었다. 세이와 홍보부의 오오츠카에게 남긴 메시지에 답이 왔고, 혼마가 직접 전화를 해도 되느냐고 했다는 전언을 받았다.

유이는 몇 초 망설이다가 번호를 눌렀다.

세 번 신호가 간 뒤, 혼마가 받았다.

“세이와 개발부, 혼마입니다.”

“타카하시입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타카하시 씨.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오츠카 씨가 연락하라고 하셨어요. 사토 씨 제안서 건이요.”

“네. 사용 보류는 공식 처리됐습니다. 홍보부와 개발부 양쪽 기록에 남겼습니다. 사토 씨에게도 본인 동의 없는 작문 사용은 불가하다고 통보할 예정입니다.”

유이는 안도의 숨을 쉬려다 멈췄다.

“통보할 예정이라는 건, 아직 통보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혼마가 잠시 침묵했다.

“네. 오늘 중으로 합니다.”

“기록은 남겼나요?”

“남겼습니다.”

“그럼 다행이에요.”

수화기 너머에서 혼마가 작게 웃었다.

“요즘 타카하시 씨는 저보다 훨씬 철저하시네요.”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낮게 말했다.

“별첨 3 쪽에서 칸다의 가게 이름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타카하시 씨가 직접 찾아가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유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건 보호하려는 말인가요, 막으려는 말인가요?”

“둘 다일 수 있습니다.”

“그럼 곤란해요.”

유이는 도서관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학생들이 책을 안고 지나갔다. 누군가는 취업 정보지를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워크맨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그녀는 그 평범한 풍경 속에서 자기 목소리가 조금 차갑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지키겠다고 말하면서, 말리려고 하지는 말아주세요.”

혼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유이는 자신이 너무 세게 말했나 생각했다. 하지만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뒤 혼마가 말했다.

“말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혼자 가게 두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 말도 불필요해 보이네요.”

“알고 있습니다.”

혼마는 숨을 고르는 듯했다.

“저는 요즘 제가 하는 말이 보호인지 욕심인지 계속 확인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타카하시 씨에게 좋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이는 수화기 줄을 손가락에 감았다.

혼마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제 모를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마음이 싫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다.

“그럼 다음 취재 일정도 오오츠카 씨 통해서 남겨주세요.”

“네.”

“그리고 회사 밖에서 따로 만나자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지금은요.”

혼마는 아주 조용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이는 그 대답이 고마웠다.
동시에 조금 아쉬웠다.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수화기를 내려놓은 손에 열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노트에 짧게 적었다.

‘지킨다는 말은 방향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 더 작게 썼다.

‘혼마. 멈추지 않겠다고 함.’

적고 나니 너무 사적인 기록 같아서, 유이는 괄호를 치지 않았다.
취재 노트와 마음의 노트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켄타는 그날 작문을 제출하지 않았다.

담임은 종례 뒤 조용히 그를 불렀다.

“나카무라, 작문 아직이지?”

“네.”

“못 썼어?”

켄타는 잠시 종이를 쥐고 있다가 말했다.

“썼는데, 내고 싶지 않습니다.”

담임은 혼내지 않았다. 대신 교탁 옆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제목이 어려웠나?”

“네.”

“내가 본 어른, 이라는 제목?”

켄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담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제목을 바꿔도 돼. ‘아직 쓰고 싶지 않은 어른’이라든가.”

켄타는 조금 놀라 담임을 보았다.

담임은 웃지 않았다.

“글은 내라고 해서 꼭 다 내야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왜 못 내는지 스스로 알면, 그것도 글이 된다.”

켄타는 종이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방과 후, 그는 곧장 집에 가지 않고 동네 목욕탕 앞에 앉았다. 아카리와 만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금 뒤 아카리가 수건 가방을 들고 골목에서 나타났다.

“여기 있었어?”

“그냥.”

아카리는 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한 시간 뒤 병우유 자판기 앞에서 다시 만났다. 켄타는 커피우유를 뽑았고, 아카리는 흰 우유를 뽑았다. 둘은 목욕탕 앞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켄타가 먼저 말했다.

“작문 안 냈어.”

“응.”

“혼나지는 않았어.”

“다행이네.”

켄타는 병우유 뚜껑을 손톱으로 만지작거렸다.

“엄마 글은, 그 사람이 가져가려 한 거잖아.”

“응.”

“엄마는 화났어?”

“응. 화났어.”

아카리가 그렇게 바로 말하자, 켄타는 조금 놀랐다.

아카리는 병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화났고, 창피했고, 조금 슬펐어. 옛날에 그 사람이 내 글을 좋아해줬다는 사실까지 전부 더러워진 것 같아서.”

켄타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 사람이 엄마를 좋아한 게 아니었어?”

아카리는 천천히 대답했다.

“어쩌면 그때는 좋아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상대의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줄 안다는 건 아니야.”

그 말이 켄타의 머릿 속에 또 다른 생각을 만들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유이를 떠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떠올랐다.

유이를 걱정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유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오고 싶었던 순간들. 혼마를 싫어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유이가 자기보다 그를 더 어른으로 볼까 봐 무서웠던 마음.

켄타는 병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나도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제대로 못 볼 수도 있겠네.”

아카리는 켄타를 보았다.

켄타는 시선을 피했다.

아카리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그걸 알면 조금 덜 다치게 할 수 있어.”

“조금?”

“응. 완전히는 어려워.”

켄타는 작게 웃었다. 씁쓸한 웃음이었다.

잠시 뒤 그가 말했다.

“사토 씨는 아직 만나고 싶지 않아.”

아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런데 언젠가 물어보고 싶기는 해. 왜 도망갔는지. 그리고 왜 이제 와서 이름을 쓰고 싶어졌는지.”

“응. 그 질문은 네 거야.”

켄타는 병을 내려놓았다.

아카리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네가 그런 질문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많이 컸다고.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칭찬처럼 들리면, 이 무거운 마음을 너무 쉽게 정리해버리는 것 같았다.

그날 두 사람은 목욕탕 앞에서 더 오래 앉아 있었다. 특별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병우유가 비워지고, 자전거가 지나가고, 골목 끝 라멘집 불빛이 켜질 때까지.

때로는 대화보다, 피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스낵 “雪”에서는 세 사람이 다시 상자를 닫고 있었다.

마마는 영수증을 원래 순서대로 묶었다. 와타나베는 자기 수첩을 덮었고, 타카하시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일부러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종이가 아니라,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마마가 말했다.

“내일 낮, 역 앞 복사점 문 열 때 제가 같이 갑니다. 복사본은 두 부. 하나는 동양출판 자료관리위원회, 하나는 제 보관용. 그 외에는 안 됩니다.”

와타나베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게 이름은 아직 쓰지 마세요.”

타카하시가 말했다.

“동의 없는 공개는 하지 않겠습니다.”

마마는 잠시 그를 보았다.

“타카하시 씨는 왜 그렇게 침착해요?”

타카하시는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와타나베가 대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타카하시는 자신이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침착한 게 아닙니다. 화를 내면, 제가 놓친 시간을 다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요.”

마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카하시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오늘 이 상자를 열게 만든 것도 결국 제 이름 때문입니다. 제 이름을 돌려받는 과정에서 또 다른 사람의 생활이 무너지면, 저는 그 이름을 제대로 돌려받는 게 아닐 겁니다.”

마마는 조용히 웃었다.

“당신, 젊었을 때도 그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타카하시도 희미하게 웃었다.

“젊었을 때는 아마 더 잘난 말만 했을 겁니다.”

그 말에 마마가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와타나베는 두 사람을 보며 입술을 힘주어 다물었다.

그는 자신도 웃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은 웃을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마마에게도 사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타카하시에게 빼앗은 것은 이름이었고, 마마에게 떠넘긴 것은 침묵이었다.

둘 다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가게를 나서기 전, 와타나베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마마는 손을 저었다.

“혼자 올 생각하지 마요. 타카하시 씨도 같이.”

와타나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타카하시는 문 앞에서 돌아섰다.

“오늘 감사합니다.”

마마는 카운터 안쪽에서 상자를 안고 있었다.

“감사는 나중에 해요. 아직 아무것도 끝난 게 아니니까.”

문이 닫히자 작은 종이 울렸다.

골목으로 나온 두 사람은 한동안 걷지 않았다.

와타나베가 먼저 말했다.

“타카하시.”

“네.”

“오늘 본 것, 회의록에 넣겠습니다. 제 이름도요.”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쿠로다 씨가 반응할 겁니다.”

“하겠지요.”

“마마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타카하시는 골목 끝 네온사인을 보았다. 비가 그친 뒤라 간판 불빛이 젖은 바닥에 번져 있었다.

“그래서 더 공식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개인의 기억으로 남겨두면 가장 약한 사람이 다칩니다.”

와타나베는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을 제가 20년 전에 했어야 했습니다.”

타카하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말했다.

“네. 그랬어야 했습니다.”

와타나베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용서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보다 먼저 사실이었다.

타카하시는 칸다역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멈췄다.

와타나베는 먼저 역으로 들어갔다. 타카하시는 전화카드를 꺼냈다가 잠시 망설였다. 사적인 전화를 걸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 말 없이 집에 가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더 어두워질 것 같았다.

그는 번호를 눌렀다.

몇 번 신호음 뒤, 아카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카무라입니다.”

“타카하시입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타카하시는 공중전화 부스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마마의 상자를 봤습니다.”

아카리는 잠시 침묵했다.

“영수증이 있었나요?”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흔적도요. 그리고 와타나베 씨가 있었던 흔적도.”

수화기 너머에서 아카리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걸 보면 마음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으셨겠네요.”

타카하시는 조금 놀랐다.

그녀는 왜 늘 이렇게 정확히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걸까.

“네.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나요?”

타카하시는 한참 생각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없는 채로 상상하는 것보다, 있는 것을 보고 아픈 편이 조금 낫습니다.”

아카리는 조용히 말했다.

“오늘 켄타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아직 만나고 싶지는 않지만, 언젠가 묻고 싶다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이름을 들고 있었지만, 같은 문장 앞에 서 있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

타카하시가 말했다.

“오늘은... 저도 듣기만 해도 되겠습니까?”

아카리가 아주 작게 웃었다.

“저도 오늘은 듣기만 하려고 했는데요.”

그 말에 타카하시도 조금 웃었다.

짧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긴 하루 끝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둘은 오래 통화하지 않았다.
업무 이야기도, 감정의 결론도 내지 않았다.

다만 끊기 전, 아카리가 말했다.

“부장님.”

“네.”

“마마를 지켜주세요. 기록이 필요하다고 해서, 제일 약한 사람부터 다치면 안 되니까요.”

타카하시는 수화기를 단단히 잡았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는 한동안 부스 안에 서 있었다.

공중전화 유리에는 칸다역의 불빛이 비쳤다. 누군가 동전을 들고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재촉하지 않았다. 1991년의 밤에는 아직 사람들이 서로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릴 줄 알았다.

타카하시는 밖으로 나왔다.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세이와미디어그룹의 사무실 불빛은 밤늦도록 꺼질 줄 몰랐다.

쿠로다는 자기 방에서 별첨 3 관련 내부 메모를 읽고 있었다. 오오츠카가 남긴 열람 기록, 동양출판의 사본 재요청, 개발부의 사용 보류 도장, 사토 켄지 제안서 처리 메모.

그리고 마지막 줄.

「동양출판 측, 칸다 소재 점포 관련 보조자료 존재 가능성 언급」

쿠로다의 손이 멈췄다.

칸다 소재 점포.

그는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주소록을 꺼냈다. 낡은 페이지를 넘기자, 희미한 글씨가 나타났다.

神田・雪. (칸다. 눈)

쿠로다는 한참 그 글자를 바라보았다.

설마 아직 남아 있을까.

영수증 같은 것은 원래 버려지는 종이다.
술집의 밤은 원래 아침이면 지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그는 그 밤들을 가볍게 사용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버려지지 않는 종이가 있다.

쿠로다는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멈췄다.

지금 전화를 걸면, 그 이름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는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대신 별첨 파일을 닫고, 책상 위에 손을 올렸다. 유리창 밖 아카사카의 밤은 여전히 밝았다. 하지만 그 밝음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어둠이 자기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 스낵 “雪” 앞에는 아직 간판이 꺼져 있었다.

마마는 양철 상자를 가방에 넣고 문을 잠갔다. 골목 입구에는 타카하시와 와타나베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나란히 역 앞 복사점 쪽으로 걸었다.

마마가 가운데에 섰다.
와타나베는 조금 뒤에, 타카하시는 반 걸음 옆에.

누군가 보기엔 그저 중년 남녀 셋이 낡은 상자를 들고 걷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자 안에는 누군가의 이름을 지운 밤과, 그 밤을 기억한 사람의 침묵과, 너무 늦게라도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의 복잡한 시간들이 들어 있었다.

복사점 문이 열렸다.

기계가 예열되는 냄새가 났다.
흰 종이가 빛을 받아 잠시 파랗게 보였다.

마마가 상자를 열었다.

영수증 한 장이 유리판 위에 놓였다.

뚜껑이 내려가고, 빛이 지나갔다.

오래된 밤이, 처음으로 복사되었다.


📚 오늘의 한 문장 — 일본어 학습 박스

1. 少しだけ、昔の話をしてもいい? [すこしだけ、むかしの はなしを してもいい?]
조금만 옛날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오래된 기억이나 민감한 과거를 꺼내기 전에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할 때 · 마마가 양철 상자를 열기 전, 타카하시와 와타나베에게 1971년 밤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한 말

2. 原本はここに置いてください。 [げんぽんは ここに おいてください]
원본은 여기에 두십시오.
중요한 자료의 원본을 함부로 가져가지 않고, 보관자의 권리를 존중할 때 · 타카하시가 마마의 영수증 원본을 동양출판으로 가져가지 않고 가게에 남겨두자고 말한 장면

3. 守ると言って、止めないでください。 [まもると いって、とめないでください]
지킨다고 말하면서, 멈추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보호라는 말이 상대의 선택을 막는 방식으로 쓰일 때 선을 긋는 표현 · 유이가 혼마에게 자신을 걱정한다는 이유로 취재를 막지 말라고 말한 장면

4. 今日は聞くだけにします。 [きょうは きくだけに します]
오늘은 듣기만 할게요.
상대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말할 수 있도록 판단이나 조언을 멈출 때 · 아카리가 목욕탕 앞에서 켄타의 이야기를 재촉하지 않고 들어주겠다고 한 말

5. わかりました。今は、そうします。 [わかりました。いまは、そうします]
알겠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상대의 경계를 받아들이고, 일단 그 방식에 맞추겠다고 답할 때 · 혼마가 유이에게 회사 밖에서 따로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받아들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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