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서랍 속 수첩
10화, 서랍 속 수첩
도쿄 1991, 나의 이름을 불러줘 | 시즌 3

복사본은 원본보다 더 하얬다.
동양출판 자료관리위원회 회의실 긴 책상 위에, 마마의 영수증 복사본이 놓여 있었다.
흰 종이 위에 1971년의 어두운 밤이 얇게 눌려 있었다.
「동양 W님, 세이와 K님」
「T.R. 오지 않음. W만.」
회의실 안의 사람들은 그 짧은 글씨를 오래 바라보았다. 아무도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종이는 가벼웠지만, 그 종이에 눌린 시간이 너무 무거웠다.
와타나베는 회의록 초안을 자기 앞에 두고 있었다. 이번에는 ‘동양출판 관계자’라고 쓰지 않았다.
와타나베 히로시.
1971년 당시 영업부.
세이와 측 쿠로다와 접촉.
그는 자기 이름이 적힌 줄을 보고도 펜을 놓지 않았다. 숨고 싶을 때일수록 이름을 써야 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 배웠다.
총무부 과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수증은 보조자료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T.R.이 타카하시 부장이라는 점과, 당시 기획안 작성 시점은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타카하시는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 마마의 영수증은 자신이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신이 그 기획안을 썼다는 것까지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건 다른 곳에 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타카하시는 천천히 말했다.
“제 손에 당시 수첩이 있습니다.”
회의실 안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와타나베도 그를 보았다.
타카하시는 말을 이었다.
“1971년 당시 업무 수첩입니다. 미래사업안 초안 작성일, 사내 회람일, 와타나베 이사에게 사본을 맡긴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관련 페이지를 제출하겠습니다.”
총무부 과장이 펜을 멈췄다.
“지금까지 보관하고 계셨습니까?”
“네.”
“왜 이전에는...”
그 질문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타카하시는 과장을 탓하지 않았다. 누구나 물을 수 있는 질문이었다. 왜 지금까지 꺼내지 않았는가. 왜 더 빨리 말하지 않았는가. 왜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을 수 있는 물건을 서랍 안에 넣어두었는가.
그 자신도 오래 물었던 질문이었다.
“사적인 복수의 증거로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타카하시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다시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와타나베의 손가락이 수첩 위에서 멈췄다.
타카하시는 덧붙였다.
“하지만 이제 제 감정만의 물건이 아닙니다. 회사 기록과 연결된 자료가 되었고, 제 딸의 원고와도 연결되었습니다. 필요한 부분은 제출하겠습니다.”
그 말은 선언이라기보다, 오래 미뤄둔 문을 여는 소리에 가까웠다.
회의록에는 이렇게 남았다.
「타카하시 류지 부장, 1971년 업무 수첩 관련 페이지 제출 의사 표명.」
와타나베는 그 문장을 적으며, 자기 이름 옆에 처음으로 타카하시의 이름이 제대로 놓이는 것을 보았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야 같은 줄 위에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와타나베는 복도에서 타카하시를 뒤따라갔다.
“수첩을 가지고 계셨군.”
타카하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모르셨겠지요. 저도 오래 모른 척했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 두 사람이 섰다. 숫자가 천천히 내려왔다.
와타나베가 말했다.
“그 수첩까지 제출하면, 쿠로다 씨는 움직일 겁니다.”
“이미 움직이고 있겠지요.”
“타카하시 자네도 더 다칠 수 있고.”
타카하시는 그를 보았다.
“그 말, 예전에는 당신이 자주 했을 법한 말입니다. 회사와 저를 지키기 위해, 제 이름을 빼야 한다고.”
와타나베는 얼굴을 굳혔다.
“맞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둘은 타지 않았다.
와타나베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그런 말 뒤에 숨을 생각없네.”
타카하시는 잠시 후 말했다.
“그럼 기록하십시오. 당신이 아는 것과, 제가 가진 것과, 마마가 보관한 것을 한 줄로 묶으십시오. 누구도 혼자 짊어지지 않게.”
와타나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일을 하라는 말이었다.
지금 와타나베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날 저녁, 타카하시는 집 서랍 앞에 앉아 있었다.
유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은 조용했다. 냉장고 소리와 멀리서 지나가는 전철 소리만 들렸다. 그는 책상 아래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쪽에는 오래된 봉투가 있었다.
낡은 고무줄로 묶인 수첩 세 권. 그중 가장 아래에 1971년 수첩이 있었다.
표지는 갈색이었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손때가 묻은 부분은 조금 검게 변했다. 타카하시는 그것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한동안 열지 못했다.
수첩은 종이일 뿐인데, 이상하게 누군가의 얼굴 같았다. 오래 만나지 않은 젊은 자신의 얼굴. 자신감이 있었고, 성급했고, 회사의 미래와 자기 미래를 구분하지 못했던 사람.
그는 천천히 첫 장을 넘겼다.
1971년 6월 12일.
「신매체 사업안 제1고」
6월 16일.
「W에게 1부. 영업회의 후 재검토」
7월 3일.
「학교도서관·지방망 관련 추가」
11월 18일.
「칸다 가지 않음. 영업자료 작성. W, 외부 미팅」
타카하시의 손이 멈췄다.
그날.
마마의 영수증에 남은 바로 그날.
T.R. 오지 않음. W만.
자신의 수첩에는 이렇게 남아 있었다.
칸다 가지 않음.
서로 다른 종이에 남은 두 문장이, 20년이 지나 같은 시간 위에서 만났다.
타카하시는 눈을 감았다.
분노보다 먼저, 젊은 자신이 불쌍했다.
그날 밤에도 그는 회사에 남아 자료를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동료가 외부 미팅을 한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쓴 문장이 누군가의 술잔 아래에서 회사 이름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다녀왔습니다.”
유이였다.
타카하시는 수첩을 덮지 않았다.
유이가 방 안으로 들어오다가 책상 위의 낡은 수첩을 보았다.
“아빠?”
타카하시는 수첩 위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유이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먼저 보여주겠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늘 유이가 묻고, 아버지는 대답할 수 있는 데까지만 대답했다. 오늘은 달랐다. 아버지가 자기 손으로 서랍을 열었다.
유이는 천천히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봐도 돼?”
타카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는 아니야. 그렇지만 필요한 부분은 봐도 된다.”
유이는 수첩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종이가 오래되어 바스락거렸다. 페이지마다 작은 글씨가 빽빽했다. 업무 일정, 거래처 이름, 회의 시간, 짧은 감상, 지하철 노선 표시, 담배를 줄이자는 메모까지 있었다.
살아 있던 시간이었다.
유이는 6월 12일 페이지를 보았다.
“신매체 사업안 제1고...”
“그때는 그렇게 불렀다. 책이 다른 매체와 연결될 거라고 생각했지. 영상, 음성, 학교도서관, 지역 유통망. 지금 세이와가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아빠가 쓴 거네요.”
타카하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초안은 내가 썼지. 하지만 회사의 일이 되면서 여러 사람이 손을 대기 시작했으니 전부 내 것이라고 할 순 없단다.”
“그래도 처음 칸은 아버지가 만든 거잖아요.”
그 말에 타카하시는 유이를 보았다.
칸.
혼마가 행사장에서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칸을 만들지 않으면 이름은 남지 않는다. 유이는 그 말을 자기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타카하시는 낮게 말했다.
“그 칸에 내 이름을 써 넣지 못했다.”
“못 쓴 거예요, 안 쓴 거예요?”
질문은 날카로웠지만, 공격은 아니었다.
타카하시는 잠시 침묵했다.
“둘 다. 처음에는 회사 일을 개인 공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고, 나중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나중에는... 그 일을 꺼내면 내가 너무 초라해질까 봐 두려웠고.”
유이는 노트를 꺼내려다 멈췄다.
오늘은 먼저 딸이어야 할지, 취재자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유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써도 돼?”
타카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부탁이 있어.”
“뭔데?”
그는 수첩을 유이 쪽으로 밀었다.
“마치 무슨 영웅처럼 꾸미지는 말아줘.”
유이는 펜을 잡은 손을 멈췄다.
타카하시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억울한 사람이지만, 완전히 깨끗한 사람은 아니다. 젊었을 때는 성공하고 싶었고, 회사 안에서 인정받고 싶었고, 와타나베를 내려다본 적도 있다. 그 사람이 나를 부러워했다면, 나 역시 누군가를 무시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빼앗긴 건 빼앗긴 거잖아.”
“그렇지. 하지만 피해자가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이 허락되는 건 아니야.”
아버지가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지 말라고 한 순간, 유이는 오히려 처음으로 아버지를 제대로 기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노하는 사람도, 침묵한 사람도, 늦게 서랍을 연 사람도 모두 한 사람 안에 있었다.
타카하시는 수첩을 다시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이건 주는 게 아니라 맡기는 거야.”
“응.”
“필요한 페이지는 내일 복사해줄게. 원본은 내가 가지고 있는게 맞을 것 같구나.”
“그게 낫겠어.”
유이는 잠시 후 말했다.
“아빠.”
“응.”
“나한테 보여줘서 고마워.”
타카하시는 창밖을 보았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일은 아니다. 너무 늦었으니까.”
“늦게라도 보여줬잖아.”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지만, 타카하시는 그것을 쉽게 받지 않았다. 다만 수첩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오래 서랍 안에 있던 시간이, 이제 다른 사람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같은 시각, 아카리는 집 식탁에서 사토가 보낸 새 봉투를 열고 있었다.
이번에는 두껍지 않았다. 안에는 편지 한 장과 세이와미디어그룹 교육콘텐츠 제안 철회서 사본이 들어 있었다.
「청소년 작문 예시 사용안 철회」
「본인 및 관계자 동의 없는 활용 중지」
「보관 복사본 반환 및 폐기 협의 예정」
문장은 여전히 행정적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좋은 사례’라는 말이 없었다.
켄타는 식탁 맞은편에서 작문 공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는 아카리의 얼굴을 살피다가 물었다.
“그 사람?”
“응. 사토 씨가 보낸 거야.”
“뭐래?”
아카리는 철회서 사본을 켄타 쪽으로 밀었다.
“내 예전 글을 세이와 교육 콘텐츠에 쓰려던 안을 철회하겠대. 문서로 남겼어.”
켄타는 천천히 읽었다. 모르는 한자가 많았지만, ‘철회’라는 말은 알 것 같았다.
“그럼 엄마 글은 돌아온 거야?”
아카리는 잠시 생각했다.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야. 이미 본 사람이 있고, 복사본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더는 쓰지 않겠다고 멈춘 거야.”
켄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멈추는 것도 사과야?”
“사과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일 때가 있어.”
잠시 후 그가 물었다.
“엄마는 그 사람 편지를 다 보관할 거야?”
“당분간은. 버리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나중에 확인할 방법이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럼 보관하는 거랑 붙잡혀 있는 건 어떻게 달라?”
아카리는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주 좋은 질문이었다. 너무 좋은 질문은 늘 대답하기 어렵다.
“보관은 내가 필요할 때 꺼내는 거고, 붙잡혀 있는 건 내가 원하지 않아도 계속 끌려가는 거 아닐까.”
켄타는 그 말을 천천히 받아 적었다.
아카리는 웃었다.
“너 요즘 나보다 더 기록을 잘하네.”
켄타도 아주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웃음이었다.
세이와미디어그룹 개발부에서는 혼마가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사용 보류’ 도장이 찍힌 사토 제안서와, 동양출판에서 새로 보낸 공문 사본이 놓여 있었다.
「타카하시 류지 1971년 업무 수첩 관련 페이지 사본 제출 예정」
「별첨 3 내 T.R.案 및 W経由 표기 관련 공식 설명 요청」
「칸다 소재 점포 관련 보조자료 확인 중」
혼마는 마지막 줄을 오래 보았다.
칸다 소재 점포.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히는 몰랐다. 하지만 쿠로다의 표정과 오오츠카의 침묵, 그리고 유이의 목소리에서 이미 알 수 있었다. 그 이름은 누군가를 지킬 수도 있고, 동시에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전화가 울렸다.
혼마는 수화기를 들었다.
“개발부 혼마입니다.”
유이였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오오츠카 씨에게 전달받은 철회서 확인했어요.”
“네. 사토 씨 건은 공식 보류에서 철회 요청으로 넘어갔습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문서로 남겨줘서 고마워요.”
혼마는 잠시 조용해졌다.
고마워요.
그 말 하나에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이 싫기도 했다.
“타카하시 씨.”
“네.”
“오늘 아버님 수첩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이는 잠시 침묵했다.
“벌써요?”
“공문이 들어왔습니다. 개발부까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세이와 내부에서는 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보여줬어요. 처음으로 먼저요.”
혼마는 유리창 밖 아카사카의 밤을 보았다.
“그건 큰일이었겠네요.”
“네. 큰일이었어요. 증거라기보다... 사람을 본 느낌이었어요.”
혼마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자료 안에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사람을 자료로만 보면 안 된다.
요즘 그는 그 두 문장 사이에서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혼마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노트에도, 당신 이름을 꼭 남겨주세요.”
유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좋았고, 그래서 위험했다.
혼마는 바로 덧붙였다.
“취재 대상들의 이름만 남기다 보면, 쓰는 사람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뜻이었습니다.”
“알아요.”
유이는 수화기 줄을 손가락에 감았다.
“혼마 씨는 가끔 좋은 말을 해요.”
“가끔입니까?”
“네. 가끔요.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해요.”
혼마는 작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유이도 조금 웃었다.
그러나 둘 다 더 친밀해질 수 있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 선이 필요했다.
그날 밤, 타카하시는 공중전화 앞에 섰다.
집 전화로 걸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집 안에서 이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유이에게 수첩을 보여준 뒤, 그는 밖으로 나와 오차노미즈역 근처까지 걸었다. 노란 전철이 다리 아래를 지나갔다.
전화카드를 넣고 번호를 눌렀다.
아카리가 받았다.
“나카무라입니다.”
“타카하시입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피곤했지만 안정되어 있었다.
타카하시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오늘 유이에게 수첩을 보여줬습니다.”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보여주셨군요.”
“네. 무서웠습니다.”
아카리는 바로 위로하지 않았다.
“무서울 것 같았어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충분했다.
타카하시는 공중전화 부스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낮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얼굴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
“나카무라 씨는 오늘 어떠셨습니까?”
“사토 씨가 제안 철회서를 보냈어요. 켄타에게 보여줬습니다.”
“켄타 군은요?”
“아직 다 이해한 건 아니겠지만, 멈추는 것도 사과일 수 있다는 말을 적더군요.”
타카하시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이 우리보다 정확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무섭죠.”
두 사람은 동시에 조용히 웃었다.
짧은 웃음 뒤에 침묵이 왔다. 이번 침묵은 전화를 끊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말이 지나간 자리에 잠시 서 있는 침묵이었다.
타카하시가 낮게 말했다.
“오늘 밤, 조금 걸을 수 있을까요?”
아카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동안, 타카하시는 자신이 선을 넘은 건 아닌지 생각했다. 업무도 아니고, 자녀 이야기도 아니고, 자료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냥 걷고 싶다는 말. 이 나이에, 이 상황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잠시 뒤 아카리가 말했다.
“어디세요?”
“오차노미즈역 근처입니다.”
“저도 멀지 않아요. 15분 정도 걸립니다.”
타카하시는 수화기를 조금 세게 쥐었다.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그는 부스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는 차가웠다. 하지만 기다린다는 말이 오늘은 무겁지 않았다.
히지리바시 위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아카리는 짙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 끝이 조금 젖어 있었다. 급히 나온 듯했지만, 숨은 차지 않았다. 타카하시는 그녀를 보자마자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 했다.
아카리가 먼저 말했다.
“사과하지 마세요. 저도 걷고 싶었어요.”
그 말에 타카하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다리 위를 천천히 걸었다. 아래로는 전철이 지나갔고, 멀리에는 대학 병원 불빛이 켜져 있었다.
1991년의 도쿄는 밤에도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야근을 했고, 누군가는 병실에서 밤을 새웠고, 누군가는 공중전화 앞에서 말하지 못한 말을 삼켰다.
타카하시가 말했다.
“수첩을 보여주고 나니, 이상하게 서랍이 비어 보였습니다.”
“오래 있던 게 빠져나갔으니까요.”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더군요.”
“빈자리도 무게가 있어요.”
타카하시는 그 말을 조용히 되풀이했다.
“빈자리도 무게가 있다.”
아카리는 난간 옆에서 잠시 멈췄다.
“저도 사토 씨 편지를 서랍에 넣어뒀어요. 버리면 편할 줄 알았는데, 버리면 또 다른 방식으로 끌려갈 것 같아서요.”
“보관과 집착의 차이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카리가 그를 보았다.
“켄타가 오늘 그걸 물었어요.”
“좋은 질문이군요.”
“너무 좋은 질문이라 대답하기 어려웠어요.”
두 사람은 다시 걸었다.
타카하시가 아주 낮게 말했다.
“조금만 곁에 있어줄 수 있습니까.”
아카리의 걸음이 멈췄다.
타카하시는 곧바로 덧붙였다.
“오늘만. 다리 끝까지라도.”
아카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고백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 감정도 없는 말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생기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 마음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각자의 아이들과 과거와 책임 위로 너무 큰 그림자가 드리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아카리는 천천히 대답했다.
“네. 다리 끝까지는요.”
타카하시는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 말도 너무 자주 하시면 안 됩니다.”
“왜입니까?”
“제가 익숙해질지도 모르니까요.”
타카하시는 아주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은 다리 끝까지 걸었다. 손은 닿지 않았다. 어깨도 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간격은 전보다 조금 좁아져 있었다.
그날 밤, 둘은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다.
다만 다리 끝에서 헤어질 때, 아카리가 말했다.
“다음에 또... 걷고 싶으면 말하세요.”
타카하시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네.”
그 대답 하나로 충분했다.
다음 날 아침, 타카하시는 수첩의 관련 페이지를 복사했다.
복사기 유리판 위에 1971년의 작은 글씨가 놓였다.
뚜껑이 내려가고, 빛이 지나갔다.
마마의 영수증과 타카하시의 수첩.
서로 다른 곳에 있던 두 개의 기록이 이제 같은 파일 안에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와타나베는 복사본을 받아 들고, 회의록 보충자료 표지에 썼다.
「1971년 세이와 협의 관련 보조자료 2」
그 아래에 이름을 적었다.
제출자: 타카하시 류지
기록 확인: 와타나베 히로시
와타나베는 펜을 내려놓고 한참 그 줄을 보았다.
이름을 쓴다고 과거가 깨끗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름을 쓰지 않으면, 과거는 계속 다른 사람의 것이 된다.
그는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세이와미디어그룹의 쿠로다에게 공문 사본이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였다.
그는 봉투를 열고 첫 장을 읽었다.
마마의 영수증 복사본 존재.
타카하시 업무 수첩 관련 페이지 제출.
별첨 3의 T.R.案 표기와 W経由 표기에 대한 공식 설명 요청.
쿠로다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책상 위 유리 재떨이는 깨끗했다. 그는 요즘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냄새가 남기 때문이었다. 냄새는 기록보다 더 귀찮을 때가 있었다.
그는 서랍에서 검은 파일을 꺼냈다.
1971년 별첨.
그 안에는 아직 꺼내놓지 않은 서류들이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빼기 위해 만들었던 문서들.
누군가의 이름을 다시 흔들기 위해 남겨둔 문서들.
쿠로다는 파일을 펼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 공문 마지막 줄을 다시 읽었다.
「공식 설명 요청」
설명.
오래전 그는 설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이제 그 방식이 조금씩 먹히지 않고 있었다.
창밖 아카사카의 유리빌딩에는 오후 햇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너무 밝아서, 안쪽은 오히려 잘 보이지 않았다.
쿠로다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기어이 서랍을 열었군.”
그 말은 타카하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직 열리지 않은 서랍은, 세이와에도 있었다.
그날 밤, 유이는 원고 노트 맨 뒤에 아버지의 수첩에서 본 문장을 옮겨 적었다.
‘W에게 1부’
단 다섯 글자의 이니셜과 짧은 문장.
그 짧은 문장이 누군가의 인생을 얼마나 멀리 돌아가게 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유이는 그 아래에 썼다.
‘수첩은 증거이기 전에, 숨기고 살아온 사람의 호흡이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문장을 적었다.
‘아버지를 영웅으로 쓰지 않는다. 사람으로 쓴다.’
창밖으로 전철 소리가 지나갔다.
서랍은 열렸다.
그러나 안에 있던 시간이 모두 나온 것은 아니었다.
오래 닫혀 있던 서랍은, 열고 난 뒤에도 한동안 냄새가 남는다.
유이는 그 냄새까지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오늘의 한 문장 — 일본어 학습 박스
1. 私の手元に、当時の手帳があります。 [わたしの てもとに、とうじの てちょうが あります]
제 손에 당시 수첩이 있습니다.
오래 보관해온 자료나 증거가 있음을 공식적으로 밝힐 때 · 타카하시가 자료관리위원회에서 1971년 업무 수첩을 제출하겠다고 말한 장면
2. 見せたいものがあります。 [みせたい ものが あります]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자료나 마음을 상대에게 먼저 꺼내 보이고 싶을 때 · 타카하시가 유이에게 처음으로 자기 서랍 속 수첩을 먼저 보여주며 한 말
3. 使ってもいいですか。 [つかっても いいですか]
써도 될까요?
상대의 말이나 자료를 글·취재·기록에 사용하기 전 허락을 구할 때 · 유이가 아버지의 수첩 내용을 원고에 써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물은 말
4. 英雄にしないでくれ。 [えいゆうに しないでくれ]
영웅으로 만들지 말아줘.
자신을 지나치게 미화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기록해달라고 부탁할 때 · 타카하시가 유이에게 자신을 억울한 피해자만이 아니라 복잡한 한 사람으로 써달라고 한 말
5. 少しだけ、そばにいてもらえますか。 [すこしだけ、そばに いてもらえますか]
조금만 곁에 있어줄 수 있습니까?
힘든 시간을 혼자 견디기 어려울 때, 상대에게 조심스럽게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하는 말 · 타카하시가 수첩을 유이에게 보여준 밤, 아카리에게 다리 끝까지 함께 걸어달라고 한 장면